판교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논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고들 말하는 대표적인 곳. 판교에 스페셜티 문화를 전파하고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카페다. 오죽하면 알레그리아 알바 출신들이 판교 카페 곳곳에 퍼지면서 이 동네 커피 맛이 상향 평준화되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물론 뜬소문일 뿐이지만, 이런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이 카페가 가진 위상이 판교에서는 높다는 의미 정도는 될 수 있겠다.

인테리어는 평범하게 깔끔하고, 통창 너머에는 녹음으로 우거진 공원의 모습이 있어서 오피스 건물로 둘러싸인 판교 안에서는 무척 좋은 조망을 가지는 곳이다.

카페 사이즈는 그리 크지 않은데, 평일에는 커피 한 번 마시기 어려울 정도로 직장인들로 붐빈다. 이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평일 방문은 권하기 어렵다. 대신 주말 및 공휴일에는 주차장이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자차가 있다면 쾌적하게 방문할 수 있다.

방문 기록

261018

첫 방문.

일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고 커피를 상당히 좋아함에도 굳이 찾아가서 마셔 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그냥 마음이 동해서 주말에 한 번 찾아와 보게 되었다. 맛있는 커피 좀 마셔 보겠다며 북한강에 강릉까지 돌아다니는 주제에 일터 눈앞에 있는 유명 스페셜티 카페를 경험해 보지 않는 것도 웃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스페셜 블렌드 ‘오아시스’ 를 마셔 봤다. 특이하게 드립서버와 잔이 따로 서빙된다. 잔은 따뜻하게 데워진 상태로 제공되어, 직접 따라서 마시는 방식이다. 조금씩 나눠 따르면서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 달라지는 향미를 느껴 보라는 의도로 보인다.

평범한 기준에서 보자면 좋은 커피는 전혀 아니다. 따뜻할 때는 텁텁한 잡미와 함께 물맛이 느껴지고, 식어 갈수록 가스로 인한 불쾌한 신맛이 도드라진다. 서빙 방식 덕분에 이 변화를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처음에는 로스팅 이후 숙성이 덜 된 원두에서 나는 맛으로 보였다. 그래도 복합적인 향미는 살아 있어서 핸드드립 특유의 차별점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메뉴였다. 그런데 이 요상한 피치향과 텁텁함을 합쳐서 얼그레이 느낌이라고 테이스팅 노트에 표기해 두는 건 억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건 좀 아니지. 그래도 이런 식의 진한 피치향과 텁텁함의 조화가 쉽게 접해 볼 만한 느낌은 아니라서, 평범한 커피에 지겨워진 커피 애호가에게는 한 번쯤 즐겨 볼 만한 스페셜한 한 잔이 될 수는 있어 보인다. 그리고 완전히 차가워지면 오히려 향미가 정돈되어서 괜찮은 맛이 된다. 내가 메뉴를 정하는 입장이었다면 이 커피는 아이스로만 제공했을 것 같다.

전반적인 느낌은 “일반적인 아메리카노와 핸드드립이 이렇게 다르다”를 확실하게 보여 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맛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서빙 스타일에서부터 느껴지는 맛과 향미까지, 이건 커피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 마셔도 아메리카노와는 전혀 다르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해 줄 수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커피를 마시고 핸드드립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커피에서 쓴맛 단맛 다 겪어 본 사람들한테나 신선하게 다가올 만한 커피지, 일반인들 입장에선 밀라노 하이패션쇼 모델들이 우주복 입고 마실 법한 음료로 느껴질 것 같다. 한 잔 마시고 “역시 나한테 핸드드립은 너무 어려운 것 같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그냥 아메리카노나 마시는 게 맞지”라며 중도 하차하기 딱 좋아 보이는 커피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다만 이 집의 평판은 주로 싱글오리진 필터커피에서 나온다고 하니, 블렌드 한 잔으로 판단하기는 이르다. 마침 작업도 길어지고 해서 싱글오리진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요즘 궁금하면 한 번 더 주문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 같다. 궁금한 걸 참는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고 있는 걸까?

과테말라 산타 펠리사 드워프 게이샤 레드 허니. 노트에 의하면 오렌지와 메이플 시럽 같은 단맛이 조화를 이룬다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물맛이 첫 모금을 강렬하게 채워 버리고, 그 뒤로는 불쾌한 쓴맛과 신맛만 뒤따를 뿐이다.

블렌드를 마실 때는 숙성이 덜 된 원두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싱글오리진에서도 똑같은 패턴이 나왔다. 처음엔 물맛, 그 뒤엔 쓴맛과 신맛. 원두가 바뀌어도 같은 증상이 나온다면 원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남은 용의자는 추출 방식이다.

무척 편향되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보헤미안 쪽의 물을 섞지 않는 핸드드립 방식과 테라로사 스타일의 물을 섞는 방식이 나름의 정석으로 교육되어 온 것 같다. 물을 섞지 않는 쪽은 묵직하고 고점이 높지만 맛의 편차가 아주 심하고, 물을 섞는 쪽은 맛의 편차가 적은 대신 고점을 노리기 어렵다. 그래도 어느 쪽이든 핸드드립의 균형 잡힌 맛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고, 원두의 상태나 의도에 따라 서로의 방식을 적절히 차용한다.

그런데 핸드드립이 트렌디해지면서, 극단적인 향을 중시하며 물을 아주 과감하게 쓰는 계파가 등장한 것 같다. 흔히 노르딕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흐름이다. 북유럽 로스터리들을 중심으로 퍼진 방식으로, 원두를 아주 약하게 볶고 물 비율을 높여서 차처럼 맑고 가벼운 커피를 내린다. 단맛과 바디를 어느 정도 내주는 대신, 산지 원두가 가진 과일향과 꽃향을 최대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게 목표다. 아이소나 알레그리아, 브루잉 세레모니 같은 곳에서 느낀 맛이 이쪽이다.

그중에 제대로 된 커피는 브루잉 세레모니뿐이었다. 그곳은 향을 극단까지 끌어올리면서도 단맛과 바디가 끝까지 받쳐 줘서, 마시는 내내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내 입장에서 끔찍한 혼종의 느낌만 난다. 노르딕 스타일의 선명한 향을 노리는 데까지는 좋은데, 그걸 받쳐 줄 원두의 상태나 추출의 정교함이 따라오지 못하니 향은 향대로 흐릿하고, 핸드드립 본래의 균형은 균형대로 무너진 어중간한 결과물이 되어 버린다.

알레그리아의 두 잔이 딱 그랬다. 덜 숙성된 원두에서 오는 가스의 신맛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걸 덮어 줘야 할 단맛과 바디는 넉넉한 물에 묽어져 버렸다. 처음엔 물맛, 뒤에는 쓴맛과 신맛만 남는 건 이 두 가지가 겹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두든 추출이든 한쪽만 문제였다면 이렇게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굳이 여러 번 와서 입맛을 버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