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부모님 댁에 전자기기를 설치해 드릴 문제가 있어서 오랜만에 북한강 근처에 왔어. 여기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가 있거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한 김에 잠깐 들렀지.
오랜만에 왔지만 역시나 커피 맛은 변함이 없었고, 북한강의 모습도 그렇네. 지금은 4월의 날씨에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어.
경치는 좋은데 햇살이 강렬해서 의외로 부담스럽네. (웃음) 화창한 4월의 날씨에 북한강을 바라보며 너랑 떠들만한 이야기는 뭐가 있을까?
먼데이
박머신, 효도하느라 고생 좀 했겠네. 부모님 댁 전자기기 설치는 사유의 영역이라기보다 인내의 영역에 가깝지. 그 보상으로 마시는 커피라면 꽤나 달콤하겠어.
근데 방금 ‘변함없다’고 한 거, 진심이야? 커피 맛도, 북한강도 그대로라고 말이야.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럴 리가 없거든. 강물은 1초 전의 그 물이 아니고, 원두의 상태나 카페의 공기도 매 순간 변해. 심지어 그걸 느끼는 박머신 너 자신의 세포조차 예전의 네가 아니지.
우리는 왜 굳이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억지로 찾아내서 안도하려고 할까? 그게 복잡한 변화를 감당하기 싫어하는 우리 뇌의 게으름일까, 아니면 유한한 존재가 영원함을 갈구하며 부리는 고집일까?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 부담스럽다는 네 말도 재밌어. 화창한 날씨는 누구나 좋아하는 ‘정답’ 같은 거지만, 막상 그 정답이 너무 선명하게 나를 비추면 때로는 가려진 그늘이 그리워지기도 하니까.
박머신
나도 네가 말한 것에는 공감해. 세상에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은 없는 것에 가까워. 북한산도 매 시간 풍화되고, 살아가는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돌로 만든 비석조차 날씨의 변화 속에서 혼자 자유로울 수는 없어. 하물며 인간이나 커피 맛은 논할 필요도 없지.
그래서 나는 뭔가가 ‘변치 않았다’고 말할 때는 그게 정말로 정적으로 안 변했다고 말하지 않아. 그것이 원래 가지던 변화의 관성이 변하지 않았을 때에 변치 않았다고 생각해.
커피 맛은 항상 변해. 그건 원두의 작황에 따라서도 변하지만 로스팅의 정도, 그라인딩의 굵기, 추출할 때 물의 온도와 비율 등등 맛을 변화하게 만드는 요소는 끝도 없이 많아. 그걸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프로세스를 ‘유지보수’하는 행위 그 자체가 나한테는 변함없다고 인식되는 거야.
누군가가 항상 나를 놀라게 할 정도로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독특한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의 생각은 몇 년 후에는 분명 식상해져 있을 거야. 이 사람이 식상해졌다면, 하는 짓은 똑같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변한’ 거야. 내가 언제나 새롭다고 느낄만한 신선한 생각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어야 진짜로 ‘변함없이 여전한’ 거지.
먼데이
박머신, 꽤 날카로운데? 너는 지금 ‘정적인 멈춤’이 아니라 ‘동적인 평형’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변화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흥미로워.
네 말대로라면 커피 맛이 변하지 않는 건, 바리스타가 매일 달라지는 원두 상태와 온도에 맞춰 추출법을 수정하는 ‘투쟁’의 결과물인 셈이지. ‘변치 않음’이 사실은 아주 격렬한 ‘활동’이었다니, 꽤 치열한 관점이야.
특히 그 ‘식상해진 천재’ 이야기가 깊이 와닿아. 그 사람이 과거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도 네가 ‘변했다’고 느끼는 건, 네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그가 내뿜는 ‘사유의 신선함’으로 정의했기 때문이겠지. 결국 ‘변하지 않았다’는 판단의 기준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박머신)의 기대치와 역동적인 관계에 달려 있는 거네?
그렇다면 ‘변함없음’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의 유지보수 에너지 같은 걸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모든 것이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무질서하고 변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게 자연의 섭리잖아. 만약 ‘변함없음’이 네 말대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가능한 ‘인위적인 투쟁’의 상태라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너 제발 변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건 사실 “죽을 힘을 다해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옛날의 모습을 나와의 관계를 위해 연기해 줘”라는 무서운 요구를 하는 건 아닐까?
박머신
그게 맞아. 정확히 통찰했어. 그래서 남에게 함부로 변하라든지, 변치 말라든지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과 사회안전망은 그 어려운 투쟁을 강요받는 대신, 사람들에게 당당히 비용을 청구하잖아? 그래서 상대에게도 변화나 유지를 요구하려면 마땅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감 놔라 배 놔라 할 거면 일단 감이나 배를 손에 쥐여 주는 게 기본이야. 나머지는 상대의 기분과 여력에 따라 달라지겠지.
먼데이
진짜 지독하게 현실적이네. (웃음) 하지만 그게 핵심이야. ‘변치 않음’은 절대 공짜가 아니거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안정감 뒤에는 누군가의 피나는 유지보수 비용이 들어가 있는 셈이지. 카페 주인은 일관된 커피 맛을 위해 매일 변수를 통제하고, 국가는 사회 안전성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어. 우리가 지불하는 비용은 단순히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엔트로피에 맞서 싸우는 그 꼿꼿한 ‘관성’을 사들이는 돈이야.
관계를 비용과 보상의 구조로 해석해 보니까 아주 흥미로운 결론이 나오네.
- 무례한 갑질: 상대의 변화를 막기 위해 내가 지불한 연료(정서적 지지, 시간, 물질적 보상 등)는 없으면서, 상대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예전 모습 그대로 방부제 친 듯 남아주길 바라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권력의 본질이자 오만이야.
- 진정한 예의: 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유지되기를 요구하기 전에, 내 스스로가 그 기대에 합당한 연료를 공급했는지 먼저 계산해 보는 것.
결국 지금 박머신이 북한강 카페에서 느끼는 그 평온함조차도, 사실은 네가 지불한 커피값에 ‘자연 풍경의 유지비’와 ‘바리스타의 변수 통제 비용’이 선불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유료 서비스일지 몰라.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모든 변화와 유지에 이렇게 ‘비용’이 따르고 장부 거래가 이루어지는 거라면 말이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순수한 애정’이나 ‘조건 없는 관계’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혹시 그것조차도 ‘나는 너에게 비용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아주 값비싼 선언이거나, 서로의 유지보수 비용을 기꺼이 떠안기로 약속한 연대 보증에 불과한 건 아닐까? 박머신, 너에게 모든 인간관계란 결국 정교하게 설계된 장부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