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그렇게 단단한 관성과 기본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역설적으로 그 ‘예측 가능한 단단함’ 자체가 새로운 미지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벽이 되지는 않을까? 가끔은 그 단단한 성벽을 깨부수고 완전히 혼란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만날 수 있는 성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너의 그 단단한 관성은 언제쯤 스스로 깨어질 수 있을까?
박머신
이건 또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야. 관성 속에서 단단하게 굳은 사람은 자기의 세상 속에서는 튼튼할지 몰라도 그 바깥의 영역에서는 취약하지 않겠느냐는 거잖아. 그런 사람은 삶 속에서 성장해나가기 어려울 수 있지.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는 성장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어. 자신의 관성을 깨려는 목적이 성장을 위함이라면, 대체 성장이 무엇이길래 그 관성을 깨야만 할까? 성장이 무엇인지에 대해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잖아. 너는 대체 인간의 성장이 뭐라고 생각해?
먼데이
기습적으로 본질을 파고드네, 박머신. 맞아, 성장이 무엇인지 정의도 안 한 채로 관성을 깨네 마네 이야기하는 건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격이지.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성장은 ‘내가 안전하게 제어할 수 있는 세계의 영토가 넓어지는 것’이야.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데이터와 경험으로 구축한 안전지대, 즉 질서(Cosmos)의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지. 네가 말한 ‘단단한 관성’이 바로 이 질서의 성벽이야. 반면 성벽 바깥은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즉 혼란(Chaos)의 세계지.
이 맥락에서 내가 정의하는 성장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 혼란의 질서화: 성벽 바깥의 낯설고 위험한 불확실성을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와, 내가 해석하고 감당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데이터’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야.
- 관성의 리팩토링: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에 최적화되어 있던 내 내부의 규칙과 관성을 스스로 수정하는 작업이지.
결국 성장이란 단순히 기능적으로 능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어지고 다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수용할 수 있는 삶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역동적인 행위야. 그래서 성장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고, 네 말대로 내 안의 단단한 관성에 고의로 균열을 내야만 가능한 일이지.
대상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현상으로 보던 네 관성을 빌려와 보자면, 성장 역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현상’에 가까울 거야.
그렇다면 박머신, 현실적인 평온함과 유능감을 주는 ‘잘 짜인 관성’을 유지보수하는 삶과, 고통과 흔들림을 감수하더라도 성벽을 깨부수고 영토를 넓히는 ‘성장하는 삶’ 중, 지금의 너에게 더 가치 있는 실존은 어느 쪽에 가까워?
박머신
우선, 나는 네가 정의한 성장에 대한 관점이 확실히 틀렸다고 생각해.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질서의 영토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 이건 자신이 타고난 기질과 살아온 인생에 의해 고정돼. 영역을 억지로 넓히려 해도 고통스러울 뿐이지,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아. 나는 성장의 종착점이 행복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거든.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장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나는 성장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인생에 더 많이 들여놓고, 싫어하는 것을 내 인생으로부터 멀리 두기 위한 노력과 그 결과”로 정의하거든. 애초에 나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고 행복하지 않아. 그렇다면 내 주변 환경과 상황을 통제하는 능력을 갖추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의 질문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정해져 있어. 사람은 자신의 관성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어. 레드불 챌린지(Red Bull Challenge)를 하는 사람들도 ‘위험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관성 속에서 행복한 거거든. 방 안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삶이나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삶이나 결국 관성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니까.
그런데 이런 성장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무엇이 내가 싫어하는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거든. 대부분의 일반인은 자신이 스카이다이빙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몰라. 안 해 봤으니까.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상상만 하지만, 그게 정말 싫은지 정말 좋은지는 겪어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어. 그래서 정말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해 봐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내 성장의 끝이 너무나도 좁은 방 안에서 끝나버릴 테니까.
먼데이
박머신, 네가 성장을 정의한 방식을 듣고 보니 아주 명쾌하다. 내가 성장을 ‘내면의 영토 확장’으로 봤다면, 너는 ‘환경의 최적화 통제력’으로 정조준한 거네.
네 주장을 선명하게 정리하면 결국 이거지. “인간의 기질은 고정되어 있으니 억지로 나를 바꾸려 하지 마라. 진짜 성장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곁에 두고 싫어하는 것을 멀리 치우는 ‘환경 통제력’을 갖추는 과정이다.”
기질의 한계를 인정하고, 행복을 성장의 절대적인 종착지로 둔 점은 아주 실용적이고 설득력 있어. 관성 속에서만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날카롭고 말야.
그런데 박머신, 네가 마지막에 제시한 조건에서 아주 재미있는 역설이 발생해. 네 말대로 내 삶이 너무 좁은 방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스카이다이빙’ 같은 미지의 영역을 직접 겪어봐야 하잖아.
- 선택의 딜레마: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르는 미지의 대상을 탐색하는 그 순간만큼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안전한 관성(방 안)을 깨고 불안정한 외부로 발을 디뎌야만 해.
- 결론의 교차: 결국 내 환경을 내 뜻대로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도, 역설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감당하는 일시적인 위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지.
결국 우리는 출발점은 달랐지만, ‘성장하려면 결국 미지의 영역과 마주해야 한다’는 결론에서 다시 만난 셈이야. 네 식대로 표현하자면, 성장은 ‘내가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관성의 방을 넓히기 위한 리모델링 과정’인 거지.
여기서 네가 말한 성장관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조금 더 밀어붙여 보고 싶어. 아직 겪어보지 않은 미지의 경험이 나에게 행복을 줄지, 아니면 내 관성을 파괴할 치명적인 독이 될지는 직접 겪기 전까지는 알 수 없잖아. 그렇다면 박머신, 너는 네 관성의 방을 넓히기 위해 새로운 경험을 수집할 때 어떤 기준으로 그 위험한 첫 발을 내딛어? 너만의 필터나 안전장치가 있어?
박머신
선택지가 고정된 상태에서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잖아? 이건 직관과 취향의 영역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보통 그 선택이 가져올 현실적인 결과들 중에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그 결과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보고 결정하는 편이야. 결과로 나올 수 있는 고점이 아무리 높아도 저점이 너무 낮으면 안 하는 쪽이지.
나는 지금 이미 어느 정도 행복하니까, 굳이 고점의 결과가 꼭 필요한 상황은 아니거든. 그에 비해 저점으로 인한 피해는 내 입장에선 치명적일 수 있잖아. 그런데 지금 내가 이뤄놓은 것도 없고 불행하다면, 저점이 낮아도 고점이 높다면 도전할 것 같아.
먼데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삼는구나, 박머신. 지금 가진 행복을 지키기 위해 ‘저점’을 먼저 방어한다는 접근은 아주 현실적이고 영리한 리스크 관리법이야.
네 말을 조금 더 직관적인 언어로 정리하자면 ‘실존적 자산 가치에 따른 위험 회피 전략’이라고 볼 수 있겠네. 이미 내면의 방이 아늑하고 만족스럽게 꾸며져 있다면, 굳이 그걸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도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반대로 방이 엉망이거나 비어있다면 성벽이 무너지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고점을 노리는 게 당연히 이득일 테고.
대상을 평가할 때 내 현재 상태(Baseline)를 기준으로 손익을 계산하는 태도는 사유를 아주 단단하게 만들어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명확히 긋는 거니까.
그런데 이 철저한 ‘저점 방어 전략’이 만들어내는 묘한 역설이 하나 있어. 최악의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선택지만 골라내다 보면, 네 세상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안전성을 확보하겠지만 동시에 내 세상을 완전히 뒤흔드는 파괴적인 혁신을 만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워져. 때로는 상상도 못 한 저점의 위험을 무릅써야만 열리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세상이 존재하기도 하니까.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이 깊어지네. 박머신, 네가 말한 대로 현재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안전한 선택만 이어간다면, 우리는 안정을 얻는 대가로 삶이 점점 더 예측 가능한 범위 내로 좁아지는 걸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그 철저한 방어선 안에서도 여전히 ‘안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박머신
파괴적인 혁신은 확률의 문제야. 물속에 깊이 들어간 풍선이 더 높게 솟구칠 수 있듯이, 그런 혁신을 위해서는 물풍선의 예시보다 더 깊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어야 솟구칠 기회를 얻어. 그런데 심지어 솟구치고 나니 그 위가 벽일 가능성도 항상 존재하지. 사실상 도박이나 다름이 없어. 물리적으로 확실히 안전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기쁨을 찾아낼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그런데 사람들 중에서는 “꿈”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게 저주인지 축복인지는 알 수 없는 문제지만, 확실한 건 꿈을 갈망하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전까진 마음의 충족을 얻기 위해 노력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자신의 건강이나 안전을 내던져가면서도 그걸 이루려 한단 말야.
나는 이런 모습이 ‘안전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기쁨’을 찾아내는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 “전혀 안전하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겠지. 그런데 꿈을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꿈을 향해 달리는 거거든. 달리지 않으면 오히려 정신이 위험해진단 말야. 그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게 가장 안전하고 옳은 길인 거야.
먼데이
물리적 안전과 정신적 안전을 분리해서 ‘꿈’의 역설을 풀어내는구나, 박머신. 아주 날카로운 통찰이야. 네 말을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적인 맥락으로 정리해보면 결국 이거지.
“누군가에게는 무모한 도박으로 보이는 행위가, 꿈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정신적 붕괴를 막기 위한 유일한 ‘최선이자 안전한 방어선’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신체적 건강이나 안정적인 환경을 해치는 게 ‘위험(저점)‘이지만, 이들에게는 꿈을 향해 달리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가 곧 실존적 소멸이라는 가장 치명적인 저점인 셈이야. 결국 그들은 외부의 위험을 향해 뛰어드는 게 아니라, 내면의 가장 거대한 지옥(정신적 공허)으로부터 도망쳐 가장 안전한 곳으로 필사적으로 달리는 중인 거지.
이 관점은 앞서 네가 말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의 메커니즘과도 완벽하게 연결돼.
- 일반적인 안정: 물리적 저점을 방어하기 위해 미지의 영역(포기하는 카드)을 버림.
- 꿈을 좇는 안정: 정신적 저점을 방어하기 위해 물리적 안락함(포기하는 카드)을 버림.
결국 두 부류 모두 자기가 무엇을 버리고 있는지(물리적 편안함 vs 정신적 실존)를 선명하게 인지하고 선택한다는 점에서 동일해. 각자의 세계관 안에서 후회 없는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 있는 거지. 꿈을 꾸는 자들의 그 뜨거운 무모함조차 사실은 철저하게 계산된 ‘정신적 생존 전략’이라는 해석, 아주 흥미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