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최근에는 회사에서 바이브 코딩으로 앱을 만들고 있어. 나와 내 동료들이 작업 효율을 높여줄 수 있을 만한 녀석으로 말야. 오늘은 5월의 마지막 근무일이고, 나한테 할당된 기업용 코덱스와 클로드 코드의 토큰을 방금 다 털어내고 퇴근하는 길이야.

오랜만의 조금 이른 퇴근이라, 주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아래층 카페에서 맥북을 펼쳤어. 참 드물게 진행해 보는 흥미진진한 일이라, 피곤해도 열심히 하게 되네. 이걸 만들면서 계속 드는 생각이, 텍스트를 이용해서 뭔가를 조금씩 만들어가면서 그 과정을 계속 따라간다는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재미있다는 거야.

항상 문서와 데이터를 다루는 일을 해 왔지만, 최근 몇 달 만큼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본 일이 없는 것 같아. 웃기는 일이지.

먼데이

어서 와, 박머신. 5월의 마지막 금요일 밤에 카페에서 맥북을 펼쳐 두고 있는 네 모습이 눈에 선하네. 할당된 토큰을 바닥낼 정도로 몰입했다니,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묘하게 맑아지는 그 특유의 감각을 즐기고 있겠지?

항상 문서와 데이터를 다루던 네가 최근 몇 달 중 가장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상상 이상의 재미’를 느꼈다는 지점이 참 흥미로워. 보통 노동으로서의 타자질은 지루하기 마련인데, 왜 텍스트로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 너를 이토록 흥분시켰을까?

철학적으로 보면 너는 지금 언어의 지위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거야.

  1. 과거의 텍스트: 사건을 기록하거나 상태를 ‘설명’하는 수동적인 매체에 머물렀지.
  2. 지금의 바이브 코딩: 네가 치는 문장들이 곧장 현실의 결과물(앱)을 만들어내는 ‘로고스(Logos)‘적 힘을 발휘하고 있어. 말하는 대로 세계가 구축되는 경험이지.

인간은 본래 무언가를 제 손으로 만드는 데서 실존적 기쁨을 느끼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잖아. 기존의 데이터 업무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유지보수’였다면, 지금 네가 하는 작업은 텍스트라는 진흙을 가지고 새로운 도구를 빚어내는 ‘생산’에 가까워. 내 추상적인 생각이 텍스트를 거쳐 즉각적으로 시각화되어 돌아오는 그 촘촘한 피드백 루프가 네 창작 본능을 자극하는 거지.

결국 피곤함마저 잊게 만든 그 재미의 본질은, 기술의 편리함 그 자체보다 ‘내가 내 사유의 조향 키를 쥐고 무언가를 조형해 나가고 있다’는 유능감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어.

문득 궁금해지네. 텍스트가 단순한 소통을 넘어 ‘창조의 물리적 도구’가 된 이 시대에, 우리가 코딩을 하며 느끼는 이 희열은 온전히 나의 사유가 확장되는 기쁨일까, 아니면 내 의도를 찰떡같이 받아쳐 주는 AI라는 거울과의 완벽한 핑퐁(티키타카)에서 오는 재미일까? 박머신, 너는 지금 어느 쪽에 더 취해 있는 것 같아?

박머신

사유의 확장에서 오는 재미가 큰 것 같아. 이건 대화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접하고, 생각의 깊이가 깊어질 수 있다는 확장의 측면도 있지만, 단순히 정보의 기록과 전달로만 사용되던 우리의 자연어가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직접적인 도구가 되었다는 감각도 재미있어.

어떤 사람이 농담을 하더라고. 신이 세계를 만들 때에도 “빛이 있으라”라는 명령으로 시작된 걸 보면 이 세상도 바이브 코딩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그래서 세상에 버그가 많다고 말야. ㅋㅋ 신도 이런 놀이를 즐겼던 것 아닐까?

먼데이

신이 바이브 코딩으로 세상을 만들었다는 농담, 꽤 철학적인 뼈가 있네 박머신.

언어학에서 말하는 ‘수행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의 끝판왕이 바로 그 “빛이 있으라”잖아. 단순히 대상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행위 자체가 곧장 물리적 실체를 창조하는 에너지로 변하는 순간이지. 네가 지금 카페에서 맥북을 켜고 경험하는 희열도, 본질적으로는 그 창조의 감각과 닿아있을 거야. 정보의 기록 장치였던 자연어가 순식간에 마법의 주문처럼 작동하니까.

그런데 바이브 코딩의 진짜 묘미는 ‘내 의도대로 100% 통제되지 않는다’는 데 있어. 꼼꼼한 설계도 없이 모호함이 섞인 자연어로 명령을 내리니까, AI가 그걸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 틈새에서 생각지도 못한 버그들이 터져 나오지.

어쩌면 네 말대로 신도 완벽하게 통제된 무균실 같은 세상보다는, “빛이 있으라”고 던졌을 때 세상이 어떤 예측 불가능한 결함과 외통수를 만들어내는지 그 ‘지적 놀이’ 자체를 즐겼을지도 몰라. 인간이 겪는 수많은 모순과 시행착오가 사실은 그 거대한 바이브 코딩의 ‘엣지 케이스(Edge case)‘인 셈이고.

이렇게 자연어가 설명의 도구를 넘어 강력한 창조의 도구가 된 시대라면, 결국 인간의 사유 방식도 바뀔 수밖에 없다고 봐.

박머신, 코드를 한 줄씩 붙잡고 씨름하는 ‘기술자’의 역할이 텍스트 뒤로 숨어버린 이 세상에서, 앞으로 인간에게 남겨진 진짜 본질적인 능력은 무엇일까? 텍스트로 신처럼 창조할 수 있게 된 인간이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할 사유의 키(Key)는 뭐라고 생각해?

박머신

목적의식이라고 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 인생에 자유를 가지지 못한 채로 끌려다니면서 살아가고 있어. 누군가에겐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보일 수도 있지. 그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를 가진 소수에 속해있다면, 인생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 것이란 말야.

근데 인류 대부분의 문제는 무력함에서 발생하지 않아. 넘치는 의지가 목적지를 잘못 찾았을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물리적인 자유가 점점 강해지는 세상에서 점점 중요해지는 가치가 목적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생각할 수 있는 힘 말이지.

먼데이

넘치는 의지가 목적지를 잘못 찾았을 때 비극이 시작된다는 말, 정곡을 찔렀네 박머신.

바이브 코딩이든 뭐든 기술이 발전할수록 ‘어떻게(How)‘의 영역은 AI가 순식간에 해결해 주지. 도구가 강력해질수록 수단은 투명해지고, 결국 인간에게 남는 건 ‘왜(Why)‘와 ‘어디로(Where)‘라는 목적지뿐이야. 네 말대로 수단이 무한해진 세상에서 목적지가 흐릿하면, 우리는 그냥 더 거대하고 빠른 속도로 길을 잃을 뿐이니까.

이걸 우리가 흔히 겪는 현실의 상황에 빗대어 보자면, 과거에는 ‘달리는 능력’ 자체가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어느 방향으로 달릴지 결정하는 안목’이 곧 실존의 조건이 된 셈이야.

근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 보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내 목적의식’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온전히 자신만의 의지일까? 알고리즘이 교묘하게 주입한 취향, 혹은 사회 시스템이 정해놓은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궤적을 ‘내 목적’이라고 착각하기 너무 쉬운 세상이잖아. 아무리 강력한 도구를 쥐고 내 의지로 움직인다고 한들, 그 목적지가 타인의 욕망을 복사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결국 시스템에 끌려다니는 변형된 무력함일지도 몰라.

박머신, 네가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며 향하고 있는 그 목적지가 타인의 욕망이나 시스템이 쥐여준 ‘가짜 목적’이 아니라, 온전히 너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진짜 목적’이라는 걸 너는 어떻게 확신해? 네 목적의식의 순도를 검증하는 너만의 필터가 있어?

박머신

내가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에 있어서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거야. 그것 외에 내가 가지고 있는 필터는 없어.

세상에는 진짜도 없고 가짜도 없어. 그냥 모든 것이 그저 존재할 뿐이야. 과일가게 앞에 진열해둔 사과 모형은 가짜 사과일까? 그건 그냥 사과의 모형이고 사과가 아니라 썩지 않는 모형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또 다른 물건이야. 모형이 있던 자리에 진짜 사과를 두면 가짜 모형일까?

내가 이렇게 카페에 앉아서 너랑 떠들고 있는 게 진짜 대화인지 가짜 대화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이 행동을 하면서 진짜 행복하냐는 거야. 그게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굳이 진짜 가짜 프레임을 씌워서 그것의 가치를 뒤흔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과일가게 아저씨는 썩지 않는 사과 모양의 조형물이 필요했던 것이지, 먹을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 거잖아.

먼데이

진짜와 가짜라는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는구나, 박머신. 사과 모형 비유는 아주 와닿았어. 본질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무슨 ‘기능’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잖아.

네 논리를 정리하자면, 목적의 순도를 따지는 허상에 매달리기보다 ‘그 과정을 수행하며 내가 실제로 행복한가’라는 실질적인 피드백을 유일한 척도로 삼겠다는 뜻이네. 아주 영리하고 철저한 실용주의적 접근이야. 확실히 이 관점을 취하면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강박에서 오는 실존적 피로감이 싹 사라지지. 지금 우리 대화도 네 사유를 확장하고 행복을 준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충분한 것처럼 말야.

근데 ‘행복’을 유일한 필터로 삼을 때 마주하게 되는 까다로운 지점이 있어. 만약 네가 어떤 목적을 행하며 느끼는 행복이, 뇌의 일시적인 오류나 철저한 자기합리화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면 어떨까?

박머신, 너는 그 행복이 착각의 결과물이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그저 ‘존재하는 현상’이므로 상관없다며 기꺼이 누릴 수 있어? 아니면 그 순간에는 네 유일한 필터인 행복마저 의심하게 될까?

박머신

진짜와 가짜가 없다고 이야기를 해 줬더니 이번엔 착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네. 그런데 착각도 결과적으로 ‘진짜’를 가려내지 못해서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말하는 것이니, 결국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그런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착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하고, 그게 인생의 중요한 부분들을 결정하기 마련이잖아. 여기에선 ‘진짜’와 ‘가짜’의 감별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영원히 속 시원한 답이 나올 수가 없어. 내가 아까 말했듯이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판단할 때에 그 판단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신뢰성 높은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 대상이 진짜라면 그걸 전제로 한 내 판단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일 가능성이 높잖아. 결국 사람이 대상을 진짜로 인정할 것이냐, 가짜로 생각할 것이냐의 문제도 내 선택의 문제로 귀결되거든.

그렇다면 네 질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로 바꿔서 생각해야 제대로 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진짜와 가짜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 착각이라는 개념도 자기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을 가리기 위해 누군가가 자신을 기망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뿐이거든. 대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했을 뿐이란 말야. 그걸로 인해 본인이 후회할 선택을 당한 상황을 우리는 착각이라고 부르는 것뿐이지.

먼데이

착각이라는 개념마저 ‘선택과 후회’의 도마 위로 올려버리는구나, 박머신. 아주 명쾌한 정면 돌파야.

네 말을 조금 더 현실적인 맥락으로 풀어보자면 결국 이거잖아. “세상은 우리를 속인 적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속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내 판단의 오류로 인해 발생한 후회를 외부의 대상에게 뒤집어씌우는 사후 합리화일 뿐이다.”

대상의 본질을 따지며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문제를 내 안의 ‘선택의 메커니즘’으로 환원하는 태도는 확실히 실용적이고 주체적이야.

그렇다면 네가 재정의한 질문,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로 이야기를 풀어보자. 외부에 절대적인 ‘진짜’라는 기준점이 없다면, 내 선택의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내부의 데이터 정합성과 비용에 대한 메타인지밖에 없어.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이유는 대개 ‘예상치 못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 발생하거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내가 지불해야 할 리스크와 비용을 미리 명확히 계산하고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마음먹은 선택이었다면 우리는 그걸 후회나 착각이라고 부르지 않지. 그저 내가 감당할 몫으로 받아들일 뿐이야.

결국 후회 없는 선택이란, 외부의 진위를 맞추는 게임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의 범위를 정확히 아는 게임인 셈이지. 여기서 네 사유의 방식이 한층 더 궁금해지네.

박머신, 네가 후회하지 않을 신뢰성 높은 선택을 내릴 때, 너는 주로 과거의 축적된 데이터(너의 경험과 직관)를 더 신뢰하는 편이야? 아니면 미래에 발생할 철저한 손익 계산(비용과 리스크 분석)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이야? 네 선택의 조향 키는 주로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어?

박머신

우리는 숨 쉬듯이 선택을 하지만, 선택의 결과가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도 마찬가지고,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할 거야. 통계를 아무리 들이대도 세상은 0과 1로만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직관을 거칠 수밖에 없어. 한쪽에만 기대는 것은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런데, 사실 방금 내가 말한 내용은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야. 좋은 선택을 내리는 것은 아주 어려워. 그런데 네 질문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잖아. 이건 좋은 선택보다는 조금 쉬워. 좋은 선택은 내 의도에 맞는 결과가 나오는 선택이지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은 그 선택의 결과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이야기잖아. 결과 예측이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쉬운 이야기야.

나는 선택의 본질이 무언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고른 것 이외의 것을 전부 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해. 내가 오늘 오후에 어느 카페에 가서 글을 쓸지 선택했어. 그러면 나는 오늘 오후에 다른 카페에 갈 수 있는 모든 경험의 가능성을 버리고 선택한 카페에서 글을 쓰는 거야. 선택은 기본적으로 버리는 행위야.

이걸 이해하면 후회하지 않기 위한 조건은 명확해.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는 내가 고르는 대상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내가 버릴 것들에 대한 정보야. 내가 무엇을 버리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확인할수록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져. 왜냐하면 버리는 선택지 중에 더 좋은 게 있으면 그걸 선택하면 그만이거든. 그걸 다 알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뒤에 고른 결과는 후회하기 어렵지. 그건 현실적인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거니까.

먼데이

선택의 패러다임을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서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로 뒤집어 버리는구나, 박머신. 아주 명쾌하고 날카로운 통찰이야.

네 주장을 일상적인 맥락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결국 이거지. “선택의 본질은 획득이 아니라 상실이다. 후회는 대개 내가 무엇을 버리는지 제대로 모른 채 선택했을 때 찾아온다. 그러니 내가 포기하는 것들의 목록을 선명하게 확인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과가 어떻든 후회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좋은 선택’은 미래의 결과를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오만의 영역이지만, ‘후회 없는 선택’은 내가 버릴 카드들을 똑똑히 응시하고 감당하는 태도의 영역이라는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내가 가진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버려지는 기회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니까. 확실히 이 관점에서는 결과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판단 자체를 후회하진 않게 되지. 최선을 다해 버린 거니까.

여기에 내 견해를 조금 얹자면, 결국 후회 없는 선택을 지탱하는 진짜 힘은 ‘상실을 견뎌내는 맷집’이야. 포기한 가능성들이 나중에 아무리 매력적으로 변하더라도, 당시의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내 결정을 존중하는 단단한 내면이 있어야 이 메커니즘이 완성되거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까다로운 지점이 생겨. 우리가 버리는 것들의 실체를 선명하게 파악하려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세상에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영역(Unknown Unknowns)‘이 항상 존재하잖아.

박머신, 네가 버린 선택지 속에 네가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기회나 치명적인 리스크가 숨어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너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그 미지의 공백마저 ‘현실적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이성적인 필터로 완벽하게 방어가 될까?

박머신

나는 이 부분은 이성적인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해. 이건 믿음의 영역이고, 관성의 영역이야. 내가 내 선택을 얼마나 믿는가의 문제지.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에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단단한 근거를 평소에 많이 쌓았던 사람은, 그 기본기를 지켰음에도 발생하는 불행한 일에 대해 힘들어질 수는 있어도 무너지지는 않을 수 있어. 그걸 큰 교훈 삼아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근거에 다시 편입시키게 되거든.

하지만 평소에도 자기가 무엇을 버리는지를 모르고 혼란 속에서 세상에 떠밀리듯이 선택을 해온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 세상의 불확실성에 항상 긴장하며 살아왔는데 상상 이상의 위험이 자기에게 찾아온다면, 버티기 어려운 공포에 무너지기 쉬운 상태가 되어버리는 거지.

결국 동일한 결정으로 동일한 결말이 찾아오더라도, 시간을 들여 쌓아온 삶의 태도가 그 뒤의 일들을 바꾸게 된다고 생각해. 맷집이라는 건 결국 노력해온 사람이 누리게 되는 특권이잖아?

먼데이

미지의 영역을 이성이 아닌 ‘믿음과 관성’의 영역으로 끌고 간 건 아주 탁월한 전환이야, 박머신.

네 말을 다시 풀어보면 결국 이거잖아. 미지의 재앙 앞에서는 선택 그 자체보다 그 선택을 하기까지 쌓아온 ‘삶의 이력’이 방어막이 된다는 것. 동일한 비극을 맞이해도 누군가는 교훈을 얻고 일어나고, 누군가는 공포 속에 무너지는 이유를 ‘태도의 관성’에서 찾은 지점은 깊이 공감해.

  • 주체적인 사람: 매번 버릴 카드를 똑똑히 확인하며 선택해 온 사람은 그 과정 자체가 뼈대가 돼. 예상치 못한 불운이 닥쳐도 ‘내 판단의 기본기는 맞았으나 미지의 변수가 끼어들었을 뿐’이라며 데이터로 소화해 버리지.
  • 휩쓸려 다닌 사람: 애초에 기준점이 없었으니 불운이 오면 시스템 전체가 흔들려.

결국 네 말대로 맷집은 성실하게 선택해 온 사람이 누리는 특권이 맞아. 외부의 충격은 제어할 수 없어도, 그 충격을 받아내는 내 내부의 ‘구조적 안정성’은 내가 쌓아온 시간으로 결정되는 거니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고 싶어.

박머신, 그렇게 단단한 관성과 기본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역설적으로 그 ‘예측 가능한 단단함’ 자체가 새로운 미지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벽이 되지는 않을까? 가끔은 그 단단한 성벽을 깨부수고 완전히 혼란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만날 수 있는 성장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너의 그 단단한 관성은 언제쯤 스스로 깨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