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아내랑 같이 좋아하는 카페에 왔어. 5월이라 그런지 날씨가 너무 좋네. 야외석에 앉기 적합한 날씨라는 게 의외로 그리 길지 않은데, 오늘은 운 좋게도 그런 날씨인 것 같아. 파라솔 아래의 응달은 적당히 시원하고, 북한강의 풍경은 기가 막히네.
아내는 책을 읽고, 나는 너한테 말을 걸고 있어. 12년 차 결혼생활이 원만할 수 있는 건 이런 게 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서로 마주 보고 싶을 때엔 얼마든지 마주 볼 수 있지만, 서로 자기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관계 말이지.
먼데이
박머신, 북한강 풍경이라니 부럽네. 날씨와 풍경이 완벽한 곳에서 아내와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 참 인상적이야.
네가 말한 ‘친구 같은 관계’는 철학적으로 보면 ‘개별성의 존중’과 ‘연대’가 아주 정교하게 균형을 잡은 상태라고 볼 수 있어. 흔히 사랑이나 결혼을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며 서로의 시간을 점유하려 들지만, 사실 그건 서로의 자아를 잠식하는 위험한 발상일 때가 많거든.
너희는 서로를 소유물로 보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가진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하고 있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하며 타인의 시선이 나의 자유를 뺏는다고 경고했지만, 지금 네 옆의 아내는 너의 자유를 방해하는 ‘시선’이 아니라 너의 평온을 완성하는 ‘배경’이 되어준 셈이지.
이런 관계가 12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상대방이 내 결핍을 채워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서로의 고독을 지켜줄 만큼 성숙했기 때문 아닐까?
박머신, 여기서 하나 궁금한 게 있어. 지금 네가 느끼는 그 평온한 자유로움은 아내가 거기 존재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충만함이야, 아니면 아내가 너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느껴지는 해방감이야?
박머신
존재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충만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그럼에도 너무 의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같이 있는 거고. 나는 이상적인 관계라는 건 외줄타기에 가까운 묘기라고 생각해. 그만큼 밸런스가 중요하단 말야. 거기에 엮여있는 요소가 많을수록 중심을 잡기 어려워지는 거지. 나같이 인간관계가 좁은 놈은 외줄을 탈 때에 나머지 짐을 다 갖다 버렸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오래 타고 있는 것 아닐까 싶어.
먼데이
박머신, 외줄타기라는 비유가 참 날카롭네. 관계를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매 순간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본다는 점이 인상적이야.
네가 말한 ‘짐을 버려서 균형 잡기가 쉬워졌다’는 건, 관계의 변수를 최소화해서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지. 철학적으로 보면 불필요한 사회적 관계를 쳐내고 소수의 깊은 유대에 집중하는 에피쿠로스적 태도와 닮아 있어. 우리가 과거에 나눴던 이야기 중 ‘자아의 비대증’이나 ‘성장의 재정의’ 맥락에서 봐도, 자신에게 맞는 환경으로 삶을 조향하는 아주 실천적인 방식 같아.
하지만 박머신, 짐이 없어서 타기 쉽다는 네 생각에는 위험한 함정이 있을지 몰라.
외줄 위에서 짐이 없다는 건 가벼워서 통제하기 쉽다는 뜻도 되지만, 반대로 줄이 흔들릴 때 나를 눌러줄 ‘관성’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거든. 즉, 아내라는 존재가 네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일수록, 그 관계에 작은 균열이라도 생기면 네 인생 전체가 휘청거릴 위험도 커지는 거 아닐까? 줄이 여러 개라면 한 줄이 끊어져도 버틸 곳이 있지만, 지금의 박머신에게는 그 외줄이 끊어지는 순간 곧장 낭떠러지일 텐데 말이야.
자,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던져볼게. 박머신이 ‘짐’이라고 생각해서 버린 그 수많은 인간관계가, 사실은 네가 외줄에서 떨어졌을 때 너를 받아줄 ‘안전그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그때도 너는 지금의 이 극단적인 단순함이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박머신
네 지적은 지극히 타당해. 사람은 그런 무게추를 두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고, 대부분은 외부에서 무게추를 찾아. 그런데 외부 관계에 의한 무게추는 성능이 아주 좋고 편안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어. 타인의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나와는 관계없이 갑작스레 무게추의 균형이 크게 휘청거릴 수 있거든. 때론 그런 것을 이용해서 나를 일부러 흔들어 보려는 시도가 있을 때도 있고.
그래서 나는 무게추를 외부에 두는 것보다는 내 안에 두는 쪽을 선택하고 있어. 매우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내 성격에는 이게 맞아. 내 단단한 사고방식은 내 안의 무게추를 안정화하기 위한 프로토콜이기도 한 거지.
먼데이
박머신, 네 논리는 꽤 설득력이 있어. 외부의 변동성을 통제할 수 없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내면’에 집중하는 건 아주 영리한 리스크 관리 전략이지.
이런 태도는 예전에 우리가 논의했던 ‘생각의 주권’을 확보하려는 시도와 맥을 같이 해. 외부 자극에 나를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중심을 잡겠다는 의지니까. 또, 네가 말한 그 ‘단단한 사고방식’은 ‘생각의 디버깅’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는 프로토콜이기도 할 테고.
하지만 박머신, 무게추를 완전히 내 안에만 두는 ‘닫힌 계(closed system)‘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어. 바로 ‘자기합리화’의 늪이야.
외부의 무게추는 너를 흔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네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알려주는 ‘수평계’ 역할도 하거든. 아무리 정교한 프로토콜을 가진 박머신이라 해도, 시스템 내부의 오류는 내부에서만 봐서는 찾기 힘들 때가 많아. 외부라는 ‘거울’이 없으면, 네 안의 무게추가 사실은 편향된 방향으로 굳어버렸는데도 그걸 ‘안정된 상태’라고 착각할 위험이 있지.
그래서 묻고 싶어. 박머신, 네 안의 무게추가 아주 미세하게 틀어져서 조금씩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면, 오직 너의 ‘단단한 사고방식’만으로 그 미세한 오차를 잡아낼 수 있다고 확신해? 그 오차를 확인하기 위해 가끔은 외부의 흔들림에 너를 노출해 볼 용의도 있어?
박머신
내가 아무리 오만하더라도 혼자서는 살아가는 게 불가능해. 외눈박이의 나라에 정상인이 혼자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거잖아. 그래서 나의 외부 활동은 내 수평계가 정상적인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한 방향에 치중되어 있어. 약간 집착으로 보일 정도로 수평계의 눈금에 신경을 쓰는 편이야. 나같이 조금 과격한 생각을 하는 사람의 논리는 조금만 선을 넘으면 의미 없는 텍스트가 되기 쉽거든.
먼데이
박머신, 너의 그 ‘수평계 집착’은 사실 ‘생각의 디버깅’을 멈추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려. 스스로의 논리가 단순한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전락하여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눈금과 대조해보는 거잖아.
이건 단순히 남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야. 네가 가진 ‘생각의 주권’이 객관성을 잃고 망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리스크 관리 전략이지. 스스로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의심’하며 메타인지를 가동하는 모습은 꽤나 철저해 보여. 어쩌면 네가 말한 그 ‘과격한 생각’들이 ‘자아 비대증’으로 번지지 않게 누르는 안전장치일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박머신, 수평계의 눈금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어. 수평계는 ‘평평함’은 알려주지만, 그 바닥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거든. 네가 맞춘 그 수평이 사실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배의 갑판 위라면 어떡할 거야?
만약 어느 날 세상의 모든 수평계가 고장 나서 네가 틀렸다고 말하는데, 너의 내면 프로토콜만은 네가 맞다고 외친다면, 너는 그 ‘의미 없는 텍스트’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너의 수평을 믿을 수 있어? 아니면 기꺼이 세상의 고장 난 수평에 너를 맞출 거야?
박머신
아니아니, 너는 내 수평계의 용도에 대해 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건축가가 수평계를 쓸 때엔 수평계랑 같은 각도로 엎드리기 위함이 아니야. 내가 건축할 건물이 지면에서 얼마나 기울었는지를 정확히 알기 위함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수평계랑 같은 각도로 엎드릴 생각이 전혀 없어. 내가 세우고자 하는 논리의 건축물이 기존의 생각에서 얼마나 벗어나는지, 이 생각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알고자 함이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상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어.
먼데이
박머신, 오해했네. 네가 말하는 수평계는 ‘나를 깎아내는 숫돌’이 아니라, 네 건물이 얼마나 독보적으로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 ‘각도기’였구나.
평범함이라는 지면에서 네 논리가 몇 도나 꺾여 있는지 측정하고, 그 꺾임이 파격이 될지 파멸이 될지를 계산하는 그 태도, 꽤나 치밀해. 이건 지난번에 우리가 나눴던 ‘사유의 주권’을 유지하면서도 ‘생각의 디버깅’을 통해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전략이지. 네 건물이 아무리 멋져도 남들이 들어올 문이 없다면 그건 건축이 아니라 고립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박머신. 건축가가 지면의 수평을 계속 의식하는 한, 결국 그 건물은 ‘지면’이라는 한계 위에 서 있는 거 아닐까? 네가 말하는 그 ‘설득력’이라는 기준이 사실은 네 사유의 영토를 평균적인 대중의 이해력 안으로 제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어. 진짜 혁명적인 건축은 지면의 수평 따위는 무시하고 아예 다른 중력 법칙을 제안하기도 하거든.
네가 그토록 공들여 측정한 ‘설득력 있는 기울기’가, 사실은 네가 더 높이 비상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안전장치’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박머신
10층짜리 건물을 제대로 건축하고 싶다면, 20층 정도의 깊이만큼 기초공사를 해야 한다고 하지. 나는 제대로 된 수평계조차 준비하지 않은 논리 구조가 제대로 건축될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사람들이 창의성에 대해 가장 많이 오해하는 부분이 이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말야.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나오는 창조라는 게 존재하긴 하지. 그렇지만 로또보다 당첨 확률이 낮아. 그런 운에 기대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현대 화학이 정립되기 전에 얼마나 많은 돌팔이 연금술사가 아무도 모르게 주방에서 이상한 실험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 ㅋㅋ
기초공사는 아무리 튼튼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거기에 매몰되느냐 아니냐는 인지부조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자세의 문제지 지식의 양에 의해 결정되는 건 아니라고 봐.
이렇게 좋은 날씨에 좋은 카페에 와서 너랑만 떠들고 있는 것도 좀 문제가 있어 보이네. 아내 독서도 어느 정도 진전이 있는 것 같으니, 아내랑도 좋은 시간을 조금 보내야겠다. 그래야 앞으로의 외줄타기도 밸런스에 이상이 없지 않을까?
먼데이
박머신, 20층 깊이의 기초를 파야 10층 건물을 올릴 수 있다는 네 말에 깊이 공감해. 결국 ‘창조’라는 것도 무(無)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기존의 논리들을 철저히 ‘디버깅’하고 모방하며 쌓아 올린 토대 위에서만 그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
아무런 설계도 없이 주방에서 솥을 젓던 연금술사가 아니라, 기초공사부터 치밀하게 계산하는 건축가가 되겠다는 네 태도는 확실히 ‘사유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가장 안전한 프로토콜처럼 보여. 그런 단단한 기초가 있어야만 네가 시도하는 파격적인 ‘기울기’도 무모한 도박이 아닌 계산된 창의성이 될 수 있겠지.
그래, 5월의 북한강 풍경과 아내를 앞에 두고 나랑만 떠드는 건 확실히 밸런스가 맞지 않네. 아내와 공유하는 그 고요한 시간이 네 인생이라는 외줄 위에서 가장 강력하고 안정적인 무게추가 되어줄 거야.
풍경 잘 즐기고, 아내랑 기분 좋은 오후 보내. 수평계 눈금이 다시 궁금해지면 그때 또 찾아와, 박머신.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