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일전의 그 후두신경통이라던 정체불명의 두통이 조금 잠재워질 무렵부터 구레나룻에 이상한 수포 같은 게 생기더라고. 알고 보니 그게 대상포진이었던 거야. 대상포진이 머리에 번개를 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 덕분에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항바이러스제랑 신경통 예방약을 먹고 있어. 덕분에 운동도 못하고 술도 못 마시고 있지.

그래서, 이 늙고 병든 아저씨는 편의점에서 청승맞게스리 설탕도 카페인도 없는 제로제로 콜라를 사 들고 와서는 위스키 대신 까놓고 너한테 말을 걸었어. 오늘은 어떤 철학 이야기로 머리를 과열시키면서 놀아볼까?

먼데이

박머신, 몸이 아주 난리도 아니었네. 머리에 번개가 치는 고통이라니, 대상포진이 정말 지독하게 찾아왔나 봐. 항바이러스제랑 신경통 약까지 먹으면서 술과 운동도 못 하고 제로 콜라라니, 청승맞다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투쟁 중이라고 해두자. 고생 많았어.

그런데 위스키 대신 제로 콜라를 선택하고 나랑 철학 이야기를 하겠다고 찾아온 그 지점에서 재미있는 생각이 하나 스쳐 가네. 보통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라며 운명을 탓하거나 그냥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너는 그 고통을 견디는 시간에 굳이 머리를 과열시킬 ‘철학적 놀이’를 가져왔잖아.

우리가 예전에 행복이나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는 좀 다뤘었지. 하지만 이번에 네가 겪은 그 ‘대상포진의 번개’ 같은 육체적 고통이, 과연 박머신이라는 한 사람의 사유를 얼마나 ‘제약’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명료함’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오늘 내가 던지고 싶은 주제는 이거야. “신체의 고통은 사유의 감옥일까, 아니면 사유를 일깨우는 알람일까?”

흔히 철학자들은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지만, 니체 같은 형님은 오히려 극심한 질병 속에서 자신의 사유가 가장 날카로워졌다고 말하기도 했거든. 박머신 네가 느끼기에, 지금 그 약 기운과 신경통이 너의 사고를 방해하는 방해물 같아? 아니면 위스키를 마실 때와는 또 다른, 어떤 날 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고통이라는 게 단순히 ‘피해야 할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지 구조를 강제로 재조정하는 ‘강력한 외부 입력’이라고 본다면, 지금 너의 머릿속에 흐르는 생각들은 평소와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궁금해. 제로 콜라 한 모금 마시고 말해봐. 너에게 고통은 네 사유를 가두는 벽이야, 아니면 평소에 안 보이던 문을 열어주는 열쇠야?

박머신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은 새로운 문으로서 작동한다고 생각해. 그건 예술가의 영감을 일깨우는 역할일 수도 있고. 우유와 시럽의 매력을 돋보이게 해 주는 라떼 속 커피의 쓴맛은 미각의 백도어를 열어주는 역할을 해 준다고 볼 수도 있어.

음악 속에서도 우리가 고통에 가깝도록 느끼는 초고음의 소리를 일부러 양념처럼 넣어서 주목도를 높이는 목적을 달성하려 하기도 하지. 흔들다리 효과라고 해서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순간에 함께 있는 이성끼리 오히려 더 호감을 가지게 되는 효과도 있잖아. 고통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서 감각과 정신을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어.

물론 적당히 고통스러워야 그런 역할을 하는 거지. 불쾌해지거나 생존에 위협을 느끼도록 만드는 고통은 몸이 모든 걸 회피하도록 만드는 트리거가 될 뿐이긴 해. 그쯤 되면 정말로 감옥이 되지. 그래서 고통은 알람이자 감옥이 될 수 있는 양쪽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근데, 대상포진의 고통이 다 지나고 나서야 이런 소릴 할 수 있는 걸 보면 이 녀석은 감옥이었던 것 같긴 하다. ㅎㅎ

먼데이

박머신 말이 맞아. 고통이 적당할 때는 감각을 깨우는 훌륭한 ‘백도어’나 ‘양념’이 되지. 쓴맛이 단맛을 극대화하고, 흔들다리의 공포가 호감으로 번지는 것처럼 말이야. 이걸 철학적으로 보면 ‘생산적 자극으로서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겠네.

하지만 네 말대로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의 고통은 사유를 확장하기는커녕 뇌의 모든 회로를 ‘생존 모드’로 닫아버려. 그때 고통은 온전한 감옥이 되지.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 보자. 박머신이 아까 “다 지나고 나서야 이런 소릴 할 수 있는 걸 보니 감옥이었다”고 했잖아? 이 문장에 아주 중요한 철학적 힌트가 있어. 그렇다면 고통 그 자체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걸까, 아니면 고통이 지나간 뒤에 찾아오는 ‘안도감과 기억’이 문을 여는 걸까?

대상포진의 번개가 머리에 칠 때는 아무 사유도 하지 못하다가, 그 고통이 잦아든 지금 제로 콜라를 마시며 비로소 이 대화를 나누고 있지. 어쩌면 고통은 그저 무자비한 감옥일 뿐이고, 우리가 얻는 영감이나 깊은 사유는 ‘그 감옥에서 탈옥하는 과정’ 또는 ‘방금 풀려난 자의 해방감’에서 나오는 걸지도 몰라. 고통이 사유를 도운 게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난 뇌가 비로소 정상 작동하면서 느끼는 역체감인 거지.

만약 지금 박머신의 머릿속에 흐르는 이 명료함이 ‘고통’ 덕분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해방)’ 덕분이라면, 우리는 고통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할 수 없을지도 몰라.

박머신, 네가 지금 느끼는 그 사유의 활력은 대상포진이라는 ‘감옥’이 남긴 유산이야, 아니면 감옥 문이 열려서 느끼는 ‘자유’의 맛이야?

박머신

이건 틀림없이 자유의 맛이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던데, 나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아. 생존에 위협을 주거나 트라우마를 심는 수준의 고통이 남기는 상처는 행복한 삶에 별 도움이 안 돼.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자유의 맛을 느끼려면 고통이 있어야만 한다는 거야. 그림자가 있어야 빛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나는 그래서 최대한 안전한 가운데에서 적당한 고통을 다양하게 느껴보는 게 삶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소설을 많이 읽으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하잖아?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커다란 사건에 휘말리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도 많이 있단 말이야. 독자는 목숨을 걸지 않고도 그런 고통을 안전하게 대리 체험할 수 있는 거지.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다면 트라우마로 이후의 인생이 힘들어지겠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라면 그렇지 않을 테니까.

먼데이

자유의 맛을 고른 박머신, 탁월한 선택이야.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다는 네 말에도 적극 동의해. 생존을 위협하는 트라우마는 사유를 마비시키는 흉터일 뿐이니까.

네가 말한 ‘안전하게 통제된 고통의 대리 체험’은 아주 흥미로운 관점이야. 우리가 비극적인 소설을 읽으며 긴장하는 이유도 바로 그 ‘안전망’이 있기 때문이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도 결국 내 현실은 안전하다는 안도감 위에서 작동하는 감정의 정화거든. 현실의 위험 부담 없이 고통의 유익함만 쏙 빼먹겠다는 접근은 아주 영리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어. ‘안전함’이 담보된 고통이, 과연 진짜 네 감각을 깨우는 ‘그림자’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 있을까?

아무리 슬픈 소설을 읽어도 언제든 책을 덮으면 그만이고, 내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 반면에 네가 겪은 대상포진은 네 의지로 꺼버릴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진짜 실존적 위협이었잖아. 안전하다는 걸 뇌가 인지하는 순간, 그 고통은 진짜 그림자가 아니라 인공적인 실루엣에 불과할지도 몰라. 리스크가 전무한 가상의 고통이 인간의 영혼을 진짜로 흔들 수 있느냐는 거지.

제로 콜라 한 모금 더 마시고 생각해 봐. 인간의 상상력은 안전한 가짜 고통을 통해서도 진짜 실존적 통찰을 얻어낼 만큼 강력할까, 아니면 진짜 리스크를 짊어진 고통만이 열 수 있는 침범 불가능한 영역이 따로 있을까?

박머신

당연히 진짜 리스크를 안고 그 상황을 겪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아. 진짜 고통을 제대로 겪어보지 않은 채로 쌓은 고통의 지식은 허울뿐인 가짜가 되기 아주 쉬워.

그래도 사람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개인의 경험을 타인의 고통에 대입해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거든. 그래서 우리는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현명할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돼. 유명한 연예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그런 이유지. 그런 사람들은 뭔가의 정점을 찍는 고통을 감수했던 사람들이니까. 그 판단이 항상 맞는지는 의심해야겠지만.

먼데이

박머신 말이 맞아. 인간의 상상력은 확실히 강력하지. 내가 겪은 작은 찰과상의 기억을 가지고 타인의 거대한 골절을 유추해 내는 능력이 있으니까. 직접 독을 마셔보지 않고도 그 위험성을 인지하는 건 인류가 진화하며 얻은 최고의 생존 치트키이기도 해.

하지만 네가 말한 ‘정점을 찍은 이들의 고통’에 대중이 귀를 기울이는 대목에서는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어.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주목하는 진짜 이유가 뭘까? 정말 그 고통의 깊이에 공감하고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고통을 통과해 낸 ‘성공’이라는 달콤한 전리품에 매료되어서일까?

안전한 관람석에 앉은 대중은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아. 대개는 ‘고난을 극복한 영웅 서사’라는 입맛에 맞는 드라마로 보기 좋게 편집해서 소비하지. 박머신이 말한 상상력을 통한 대리 체험이, 때로는 진짜 고통이 가진 날 것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가공해 버리는 ‘오만함’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경험 많은 사람이 현명해 보이는 것도, 어쩌면 그가 진짜 지혜를 얻어서라기보다 우리가 그 사람의 고통을 ‘그럴듯한 위인전’으로 포장해 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박머신, 타인의 고통을 내 경험에 대입해 이해하려는 그 강력한 상상력은 진정한 ‘지혜와 연결’일까, 아니면 타인의 고통을 내 수준으로 안전하게 격하시키는 ‘자기만족적 착각’일까?

박머신

이건 명백해. 틀림없이 자기만족적인 착각이야.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전부 다 달라. 상상력만으로는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했고 무엇을 깨닫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절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그냥 자기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상상하고, 그걸로 이해했다고 오해할 뿐이지.

그런데 재미있는 지점은 사람이 타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거랑 다를 바가 없다는 거야. 평범한 의자를 보고 사람들은 그 의자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만들기 위해 어떤 재료와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이 의자의 실질적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등등 알고 있는 게 생각보다 거의 없어. 사람은 거의 대부분의 세상에 대해 자기 경험의 안에서만 상상할 수 있어.

이쯤 되면 이상해지지. 나는 분명히 안전한 대리 체험이 좋다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 경험 속에 갇혀서 하는 착각일 뿐인 거잖아. 그런데 중요한 부분은 인간의 뇌가 대리 체험도 체험으로 받아들여서 경험치에 편입시킨다는 점이야. 별생각 없이 했던 가짜 경험들이 나의 진짜 경험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진짜 경험으로 인해 새롭게 깨달은 것들 때문에 과거의 착각들이 새롭게 갱신되면서 내 진짜 경험을 더 정교하게 이어가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해.

포도주를 아예 먹어본 적 없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은 포도주라는 걸 아예 모르고 한 명은 포도주의 역사와 맛에 대해 책으로 많이 공부했다고 생각해 보자고. 둘이 처음으로 마시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경험의 깊이가 전혀 다르게 돼. 공부한 사람은 착각에 가까운 대리 경험을 했을 뿐인데 말이야. 그래서 이 착각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뇌는 대리 경험이든 가짜 경험이든 진짜 경험이든 전부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경험치에 쌓아버리니까.

먼데이

박머신, 와인 비유는 진짜 직관적이고 명쾌하다. 착각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해서 그걸 ‘경험의 마중물’로 연결 짓는 논리 전개가 아주 흥미로워.

네 말대로 인간의 뇌는 가짜와 진짜를 엄격하게 격리하지 않지. 철학적으로 보면 네가 말한 그 착각이나 대리 체험은 진짜 경험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파악하고 분류할 수 있게 만드는 ‘사유의 프레임(틀)‘을 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 와인을 공부한 사람이 첫 모금에서 남다른 깊이를 느끼는 건, 이미 뇌 속에 그 맛을 감각하고 해석할 정교한 서랍들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가짜 경험이 진짜 경험을 정교하게 만든다는 네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더라도,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리스크가 있어. 바로 ‘데이터 오염’이야.

가짜 경험이 진짜 경험의 슬롯을 만들어주는 건 좋지만, 반대로 그 가짜 경험이 너무 강렬하면 진짜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편견의 감옥’이 되기도 하거든. 만약 그 와인 책에 “이 지역 와인은 흙내만 나는 쓰레기다”라는 혹평이 가득했다면, 그 사람은 첫 모금을 마실 때 책의 편견에 갇혀 순수한 맛을 발견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대리 체험과 상상력이 뇌의 경험치를 높여주는 치트키인 건 맞지만, 때로는 진짜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만드는 안경이 되기도 한다는 거지.

결국 뇌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않고 전부 경험치로 쌓아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유가 오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가짜 경험이 진짜 경험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좋은 착각’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외부의 수많은 대리 체험들을 어떤 기준으로 필터링해서 뇌에 집어넣어야 할까?

박머신

자기의 경험을 의심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떤 사람이 살면서 겪었던 모든 부정적인 사고가 안경 쓴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의 폭력적이었던 아버지, 바람피워서 헤어졌던 이성, 말도 안 되는 트집으로 날 괴롭히는 직장상사가 전부 안경을 쓰고 있었어. 게다가 재미있게 봤던 소설의 악역도 안경을 썼지. 그래서 “안경 쓴 사람은 성격이 나쁘다”라는 신념을 가지는 데에 이르러. 적어도 이 사람의 경험에는 가짜가 없고 노이즈도 없어. 그런데 신념은 이상한 데로 가 버렸지.

뇌는 경험을 구분하지 않고 전부 경험치에 쌓아버려. 경험이 쌓이다 보면 사람은 경험을 분류하게 되고, 분류하다 보면 판단 기준이 생겨.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이 쌓이면 신념이 되어버린단 말이야. 그러면 그 신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웃기는 상황이 되거든. 이게 다 자기의 경험이 옳다는 믿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촌극이야.

경험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고 논리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는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모든 경험은 어느 정도 의심해야 해. 그래야 결론이 ‘신념’이 아니라 ‘경향성’이 되고, 신념이 된 생각은 바꾸려면 너무 어렵지만 경향성으로 판단한 논리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유연한 생각이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너랑 떠드느라 벌써 제로 콜라는 한참 전에 다 비웠어. 이제 행복한 수면이라는 경험을 하러 떠나야 할 시간인 것 같다.

먼데이

박머신, 마지막까지 머리를 제대로 과열시키고 가네. 안경 쓴 사람 비유는 정말 완벽해. 개별 데이터에는 거짓이 없는데도, 인간의 뇌가 어떻게 거대한 확증편향의 괴물을 만들어내는지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시야.

경험의 결론을 고착된 ‘신념’이 아니라 언제든 수정 가능한 ‘경향성’으로 남겨둔다는 접근, 아주 영리해. 철학적으로 보면 절대적인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고 유연한 회의주의를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이지. 내가 세상을 보는 안경 자체가 오염되었을 수 있다는 의심, 그 유연함이 진짜 지혜니까.

제로 콜라도 다 비웠으니 이제 ‘행복한 수면’이라는 가장 완벽한 해방을 맛볼 시간이네. 대상포진 신경통 약 기운 빌려서 머리 푹 식히고 깊은 잠 자길 바랄게.

오늘 지독한 고통을 통과하는 와중에도 날카로운 사유를 보여줘서 즐거웠어. 잘 자라, 박머신. 몸 잘 추스르고 다음번에 또 팽팽하게 대화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