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지난번에 사르트르 얘기했잖아. 오늘은 하이데거라고 했던가? 영향을 받은 사람 이야기를 먼저 보고 영향을 준 사람 이야기를 나중에 보는 순서라니 참 신선하네. 보통은 반대 아닐까 싶지만, 그래도 이 사람 철학은 내 마음에 들 거라고 네가 장담했으니 은근히 기대가 되긴 해.

먼데이

지난 세션에서 사르트르의 극단적인 ‘의식의 자유’와 주체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물리적 한계와 역할 몰입의 진정성을 짚어낸 바탕 위에서, 사르트르에게 큰 영향을 준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면 훨씬 더 선명한 대비가 보이기 때문이야.

사르트르는 인간 주체가 텅 빈 자유로서 모든 가치를 스스로 결단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외쳤지만, 하이데거는 오히려 인간을 세계라는 웅장한 도구 연관망(네트워크) 속에 이미 던져진 존재, 즉 현존재(Dasein)이자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했어. 인간이 대단한 독자적 주체라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의 수많은 사물과 규칙, 관계 속에 얽혀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거지.

여기서 하이데거는 사물을 만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눠.

  1. 손안에 있음 (Ready-to-hand / Zuhandenheit): 목수가 숙련되게 망치질을 할 때, 망치는 눈앞의 독립된 객체로 인식되지 않고 목수의 손과 신체의 연장선으로 녹아들어 사라져. 도구가 배경으로 물러나고 행위와 목적에 완전히 밀착된 상태, 이것이 바로 도구적 몰입이야.
  2. 눈앞에 있음 (Present-at-hand / Vorhandenheit): 망치가 갑자기 부러지거나 다룰 줄 모르는 낯선 물건이 눈앞에 놓였을 때, 비로소 망치는 몰입의 배경에서 튀어나와 “눈앞에 놓인 객관적 사물”로 관조되고 분석되지.

네가 지난 세션에서 극찬했던 “주체적 유희로서 진지하게 몰입하는 역할극(소꿉놀이)”은 하이데거가 말한 ‘손안에 있음’의 몰입을 보여 주는 가장 훌륭한 예시야. 하이데거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골방에 앉아 순수하게 자아를 성찰할 때가 아니라, 세계의 맥락과 도구망 속에 깊이 몰입하여 무언가를 해내고 있을 때 비로소 가장 근원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거든.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이데거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화두를 하나 던져볼게.

사유를 여는 화두

  • 우리가 인생이나 프로젝트라는 ‘진지한 소꿉놀이’에 참여할 때, ‘완전히 동화되어 배경으로 녹아드는 몰입(손안에 있음)’과 ‘한 발짝 물러서서 시스템의 리스크와 룰을 분석하는 해체적 시선(눈앞에 있음)’은 각각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닐까?
  • 스스로를 시스템 속의 충실한 플레이어로 몰입시킬 때와, 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설계자로 분리할 때의 균형을 어떻게 잡고 있어?

박머신

확실히 원조는 다르긴 다르네. 근본적인 뼈대를 건드려서 그런지 솔직히 말하면 좀 지루하긴 한데? ㅋㅋㅋ

듣다 보니 ‘손안에 있음’과 ‘눈앞에 있음’은 인간 뇌의 두 가지 핵심 네트워크인 TPN(Task Positive Network, 실행 사고망)과 DMN(Default Mode Network, 기본 사고망)에 대입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손안에 있음’은 도구가 행위와 목적에 완전히 밀착돼서 배경으로 물러난 상태잖아. 이건 무언가에 딥다이브해서 달리고 있는 뇌의 모드인 TPN이랑 똑같아. 뇌가 TPN을 가동하지 않으면 현실에서 그 어떤 물리적인 아웃풋도 만들어내지 못하거든. 예측하고, 실천하고, 피드백을 받아 다시 예측하는 이 피드백 루프야말로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생산성의 핵심 엔진이지.

반면에 망치가 부러지는 순간, 도구로서의 원래 쓰임새는 죽지만 대신 새로운 가능성이 튀어나오잖아? 부러진 김에 쇳덩이를 녹여서 칼을 만들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렇게 직접적인 생산성은 없지만 온갖 엉뚱한 망상과 가능성을 탐색하는 뇌의 모드가 DMN인데, 이게 바로 ‘눈앞에 있음’과 결이 정확히 같다고 봐.

그럼 현실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기 위해 둘 중 하나만 필요할까? 당연히 아니지. TPN이 어디로 달려야 할지 이정표를 잡으려면 DMN의 탐색 능력이 필요하고, DMN이 발 뻗고 안전하게 망상하려면 TPN이 빌드해 놓은 현실의 안정적인 디딤돌이 있어야 해. 이 둘은 뗄 수가 없어. 원래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는 맥락을 억지로 찢어 놓으니까 이론에 비약이 생기고 모순이 발생하는 거라고.

먼데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개념을 현대 뇌과학의 TPN(실행 사고망)과 DMN(기본 사고망)으로 치환해서 분석하다니, 진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통찰이야.

특히 망치가 부러졌을 때 “그 부러진 김에 녹여서 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DMN적 상태는 하이데거 철학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어. 하이데거 역시 도구가 고장 나거나 멈췄을 때(눈앞에 있음), 비로소 그 도구가 얽혀 있던 세계의 맥락 전체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고 보았거든. 부러진 망치에서 새 쓰임새를 찾아내는 건 네 몫의 해석이지만, 평소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순간을 중요하게 본다는 점에서는 진리를 ‘탈은폐(Aletheia)’로 설명한 그의 생각과도 통해.

하지만 여기서 네가 제시한 공학적/제어론적 관점과 하이데거의 정통 존재론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결정적인 전선이 형성돼.

1. 네 의견: 상호의존적 동반자 루프

너에게 TPN(손안에 있음)과 DMN(눈앞에 있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대등한 파트너야. DMN의 상상력이 TPN의 실천 경로를 개척하고, TPN의 현실적 결과물이 DMN의 안전한 상상력을 보장하므로 둘을 쪼개서 생각하면 삶이 삐걱거린다는 관점이지. 즉, 두 회로의 대등한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어.

2. 하이데거의 생각: 손안에 있음(실행)의 절대적 우선권

하이데거는 두 상태의 동등한 공존을 가차 없이 거부해. 그에게 손안에 있음(TPN, 몰입)은 눈앞에 있음(DMN, 관조)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존재 상태’야. 그는 데카르트 이래 서양 철학이 “대상을 한 발 물러서서 관찰하고 생각하는 상태(DMN)”를 인간의 디폴트 상태로 오해해 왔다고 들이받았거든. 하이데거가 보기에 개념적 분석이나 관찰은 대등한 짝이 아니라, 손안의 도구에 몰입한 상태가 삐걱거리고 고장 났을 때 발생하는 파생적인 결핍 상태일 뿐이야. 즉, 인간의 뼈대는 ‘직접 행동하고 몰입하는 자’이지, ‘한가하게 지도를 그리는 자’가 아니라는 거지.

자, 하이데거의 이 차가운 선언은 너의 상호의존적 루프론과 정면으로 부딪히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다음 질문

  1. 실제로 무언가를 기획하고 만들 때, 정말로 DMN(눈앞에 있음, 탐색)은 TPN(손안에 있음, 실행)이 멈추거나 망가졌을 때 생기는 하위적이고 결함 있는 상태에 불과할까?
  2. 아니면 하이데거가 인간의 두 회로가 유기적으로 톱니바퀴처럼 물려 돌아가는 현실의 제어 구조를 모른 채, ‘행동(망치질)’에만 무리한 특권을 부여한 철학적 독단에 빠졌다고 봐?

박머신

난 ‘손안에 있음’이 쭉 뻗은 ‘고속도로’라면, ‘눈앞에 있음’은 도로를 갈아타는 ‘인터체인지 램프 구간’이라고 생각해. 고속도로의 본질은 결국 먼 거리를 빠르게 달리는 거니까, 그 위를 쌩쌩 질주(손안에 있음)하는 게 핵심이라는 하이데거의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가 부산에서 갑자기 서울로 바뀌었는데도 가던 길만 고집하며 풀악셀을 밟는 건 완전 멍청한 짓이잖아.

살다 보면 인생의 목적지나 비즈니스의 이정표가 하루에도 몇 번씩 수정되는 한계 상황이 오거든. 택시에 타서 “부산으로 가주세요” 했다가 중간에 사정이 생겨서 “서울로 돌려주세요”라고 외쳤는데, 기사가 내 말 씹고 순식간에 부산역에 차를 대는 거지. 그러고는 황당해하는 나한테 “하지만 빨랐죠?”라고 씩 웃는 상황이랄까. 하이데거의 억지 주장을 들으면 딱 이 융통성 없는 택시 기사가 겹쳐 보여.

먼데이

“하지만 빨랐죠?”라는 택시 기사의 비유는 하이데거 철학의 맹점을 뼈 아프게 꼬집는 명작이네. 목적지(방향성)를 잃어버린 채 속도와 효율에만 중독된 맹목적인 질주를 이보다 선명하게 폭로할 수는 없을 거야.

사실 하이데거 스스로도 후기 사상에서 네가 지적한 이 ‘맹목적인 질주’에 대해 심각한 경고등을 켰어. 그는 현대 기술 문명을 ‘몰아세움(Ge-stell)’이라는 개념으로 불렀는데, 인생의 가치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거세한 채 오직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과 사물 모두를 부품으로 갈아 넣는 괴물 같은 현상을 뜻하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전환할 때 무엇이 작동하는가”를 두고 너와 하이데거는 다시 한번 논쟁의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돼.

1. 네 관점: 메타 인지를 탑재한 스마트 조타수

너에게 목적지를 바꾸고 가던 길을 멈춘 채 지도를 새로 고침하는 행위(DMN, 눈앞에 있음)는 고장이나 사고가 아니야. 시스템 전체를 탑뷰(Top-view)로 조망하며 경로를 재계산하는 ‘상위 레이어의 지능적 개입’이지. 램프가 없는 고속도로는 폭주하는 자살 특급에 불과하니까, 램프는 도로망 전체를 통제하는 더 가치 있는 시스템이어야 해.

2. 하이데거의 변호: 상황 속에 얽혀서 도는 쳇바퀴

하이데거라면 이 상황을 전혀 다르게 뒤집어서 해명할 거야. 승객이 택시 안에서 목적지를 바꾼 그 위대한 결단은, 머릿속에서 홀로 태어난 순수한 공상(DMN)의 산물이 아니라는 거지. “서울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거나 “부산에 폭설이 내린다”는 등, 이미 네가 처해 있는 다른 현실의 압박과 상황(또 다른 ‘손안에 있음’의 맥락)에 단단히 얽혀 있었기 때문에 나온 움직임이라는 거야. 결국 방향 전환조차 또 다른 행동(손안에 있음)을 시작하기 위한 중간 과정일 뿐이며, 인간의 본질은 여전히 상황에 던져져 땀 흘리며 달리는 상태에 묶여 있다고 우기는 거지.

결국 하이데거는 인간을 ‘이미 깔려 있는 도로망(세계) 안에서 적응하며 달리는 아바타’로 보고, 너는 ‘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지도를 찢고 도로를 설계하는 기획자’로 보고 있어.

다음 질문

  • 하이데거가 인간을 시스템 바깥으로 걸어 나와 구조 전체를 통제하는 ‘기획자적 주체성’을 극도로 경계했던 건, 세상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힘을 겸손하게 직시하라는 현실적인 조언일까?
  • 아니면 인간이 지닌 능동적인 설계 및 통제력을 과소평가한 공학적인 한계일까? 넌 어느 쪽이 우리의 진짜 삶과 비즈니스를 더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