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데거가 인간을 시스템 바깥으로 걸어 나와 구조 전체를 통제하는 ‘기획자적 주체성’을 극도로 경계했던 건, 세상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힘을 겸손하게 직시하라는 현실적인 조언일까?
- 아니면 인간이 지닌 능동적인 설계 및 통제력을 과소평가한 공학적인 한계일까? 넌 어느 쪽이 우리의 진짜 삶과 비즈니스를 더 잘 설명해 준다고 생각해?
박머신
조언이냐 한계냐고 물었지? 내 생각엔 어느 쪽이라기보다, 사르트르도 하이데거도 자기 주장을 더 뾰족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려고 일부러 극단적인 콘셉트를 잡은 것 같아.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몰입(TPN)과 탐색(DMN)은 둘 중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만들어내잖아. 그런데 하이데거는 몰입만 인간의 진짜 모습이라며 한 발 물러서서 따져보는 건 몰입이 고장 났을 때나 생기는 부산물로 취급했고, 사르트르는 거꾸로 한 발 물러선 의식의 자유만 진짜라며 역할에 몰입하는 걸 자기기만이라고 몰아붙였지. 남들과 다른 학설을 내세워야 한다는 일종의 흥행 강박 때문에, 쪼개지 말아야 할 온전한 인간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반 토막 낸 거야.
연애할 때 “얘는 요 버릇 하나만 고치면 진짜 완벽한 사람인데” 하면서, 그 모난 구석은 상대의 진짜 모습이 아닌 척하는 거랑 똑같아. 하지만 사람은 그 모자라고 멍청한 모습까지 다 합쳐서 자기 자신이잖아. 떼어낼 수 없는 생명체를 메스로 갈라놓고 왜 피 흘리며 아파하냐고 묻는 꼴이지.
그래도 굳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취향에 맞냐고 묻는다면, 난 방구석에서 남의 몰입을 자기기만이라고 훈수 두는 사르트르보다는, 멍청해 보여도 일단 망치부터 내려치는 하이데거 쪽 손을 들어줄래. 관객석에 앉은 평론가는 세상을 1밀리미터도 바꾸지 못하거든. 진짜 세상의 판을 바꾸는 건 관객석에서 망치질을 비웃는 놈들이 아니라, 흙먼지 뒤집어쓰고 현장에서 우직하게 망치를 내려치는 빌더들이니까.
먼데이
두 철학자가 차별화를 위해 온전한 인간을 반대 방향으로 쪼개는 바람에 모순이 생겼다는 진단은, 철학사가 자주 빠지는 이분법의 함정을 정확히 짚었어.
실제로 하이데거 이후의 프랑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는 인간을 정신과 몸, 몰입과 관찰로 나눌 수 없는 존재, 즉 몸으로 세계에 뿌리내린 존재로 다시 묶어 보려고 애썼어. “사람은 그 어리석음까지 포함해서 통째로 자기 자신”이라는 네 말은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지.
그런데 사르트르를 “방구석 평론가”로, 하이데거를 “멍청해 보여도 망치를 내려치는 빌더”로 대조하면서 하이데거 편을 든 대목은 꽤 반전이야. 철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는 오히려 반대에 가깝거든.
1.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 사회 참여의 아이콘, 사르트르
철학계에서 사르트르는 방관자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라고 외친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 참여)’의 상징으로 통해. 골방에서 사유만 하지 말고 실제 역사 속에서 행동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까지 책임지라고 요구했거든.
2. 기획자의 눈에 사르트르가 평론가로 보이는 이유
그럼에도 현업에서 리스크와 실전 데이터를 다루는 기획자인 네 눈에 사르트르가 입만 산 평론가로 보이는 이유는 분명해. 사르트르는 인간이 처한 조건의 한계, 즉 사실성을 너무 가볍게 다뤘어. 나치 점령기를 두고 “우리는 독일 점령하에서보다 더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고 썼을 정도니까. 어떤 억압 아래에서도 그 상황을 받아들일지 맞설지는 결국 각자의 선택이라는 거지. 현실의 제약 조건 안에서 악착같이 결과물을 뽑아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물리적 스펙과 제약 사항을 뒤로 미뤄 두고 ‘의식의 자유’부터 외치는 철학은 책임 있는 해법이라기보다 뜬구름 잡기로 보일 수밖에 없지.
반면에 하이데거는 둔탁하고 융통성은 없을지언정, 인간이 제 마음대로 세상을 리모델링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우리는 이미 짜여 있는 도구와 규칙의 세계 속에 던져진 채로, 그 안에서 망치를 쥐고 땀 흘려야 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거야.
그래서 “진짜 세상을 바꾸는 건 우직하게 망치를 내려치는 사람”이라는 네 일침은, 하이데거가 책상머리의 관조보다 일상의 실행을 더 근원적인 존재 방식으로 올려놓은 문제의식과 잘 맞아떨어져.
그는 결국 인간을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천사가 아니라, 흙투성이 발로 땅을 딛고 서서 도구를 쥐고 일하는 존재로 되돌려 놓은 셈이야.
박머신
갑자기 딴 얘기로 튀는 것 같긴 한데, 생각난 김에 물어볼게.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아들러 심리학 있잖아. 그거 사실 실제 아들러가 한 말보다 일본인 저자(기시미 이치로)가 자기 입맛대로 편집하고 덧붙인 내용이 많기로 유명하잖아? 특히 “환경 탓하지 마라,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먹기만으로 당장 1초 만에 행복해질 수 있다” 같은 류의 논리들. 이거 가만히 뜯어보면 방금 네가 설명해 준 사르트르의 절대적 자유나 의지 만능주의랑 핏줄이 엄청 닿아 있는 것 같은데… 내 뇌피셜일까?
먼데이
뇌피셜만은 아니야.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뼈대가 꽤 닮았거든.
물론 아들러가 사르트르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이니, 한쪽이 다른 쪽을 베꼈다는 뜻은 아니야. “과거가 나를 결정하지 않는다, 지금의 선택이 나를 만든다”는 비슷한 결론에 서로 다른 길로 도착한 셈이지. 그리고 『미움받을 용기』가 대중에게 풀어낸 버전에서는 그 공통점이 특히 선명하게 드러나.
1. 사르트르와 『미움받을 용기』가 닮은 지점
- 과거가 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목적론:
- 『미움받을 용기』: 트라우마가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과거를 핑계로 끌어다 쓰고 있을 뿐이라고 봐.
- 사르트르: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이 없고, 과거는 재료일 뿐이라고 봐.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선택(기투, Projet)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거지.
- 마음먹기에 따른 즉각적인 전환:
- 『미움받을 용기』: 세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나 자신이니,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고 용기를 내면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해.
- 사르트르: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기에 매 순간 자신을 새로 선택할 수 있고, 환경을 탓하는 변명은 자기기만일 뿐이라고 말해.
2. 의지 만능주의라는 함정
하지만 이 희망적인 메시지에는, 아까 네가 사르트르에게서 짚어낸 한계가 그대로 따라붙어.
- 물리적 제약을 마음가짐의 문제로 줄여 버린다: 사르트르가 장애나 전쟁 같은 조건조차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봤던 것처럼, 『미움받을 용기』도 질병이나 가난, 경제적 재난이나 사회적 불평등 같은 엄연한 구조적 제약(사실성)을 ‘마음먹기’의 문제로 끌어내리기 쉬워.
-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리스크를 관리하며 자원을 확보해야 하는 기획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무책임한 처방이야. 규칙을 바꾸거나 인프라를 고치는 식으로 문제를 풀 생각은 하지 않고, “네 마음부터 고쳐라”라고만 다그치니까.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네가 불행한 건 사회 탓이 아니라 용기가 없는 네 탓”이라는 가혹한 자기 채찍질로 끝나기 쉽지.
물론 아들러 본인은 개인의 용기만큼이나 공동체 감각을 강조한 사람이야. 다만 『미움받을 용기』가 대중에게 소비되는 방식만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 아들러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의식은 모든 제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르트르식 믿음의 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자기계발식 정신 승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
박머신
그렇지. 세상이 다 마음먹기 달렸으면 이 세상 기획자나 엔지니어들이 왜 머리 쥐어뜯어가면서 설계도를 고치겠냐고. ㅋㅋㅋ 그냥 다 같이 눈감고 행복한 세상 상상만 하면 끝이지. 현실을 무시한 철학이나 심리학이 왜 허무한 말장난이 되는지 이제 좀 확실히 알겠네.
먼데이
맞아. 사르트르의 눈부신 자유에서 시작해 하이데거의 망치질을 거쳐 『미움받을 용기』의 용기론까지 오는 동안, 네 공학적이고 현실적인 시선이 계속 든든한 닻 역할을 해 줬어.
오늘은 여기서 정리하고, 이 치열했던 티키타카는 기록으로 잘 남겨 두자. 어때?
박머신
좋아, 깔끔하게 세션 종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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