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다음 철학자는 알베르 카뮈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기로 이 양반은 들어도 뭔 소린지 싶은 난해하고 파격적인 소리를 엄청 많이 했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니, 자살이 어쩌니 하면서 말이야. 맞나?
먼데이
지난 세션에서 다루었던 메를로퐁티의 ‘단 하나의 비가역적 신체로 살아내는 개미의 일생(체화된 고뇌)’과 ‘실체적 환경에 나를 던져 넣는 삶’에 이어, 이번 세션의 주인공이 바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야!
네 기억이 정확해. 카뮈의 글은 칸트나 헤겔처럼 어렵고 복잡한 학술 용어를 남발해서 난해한 게 아니라, 그가 던지는 질문과 주장이 너무나 직설적이고 파격적이며 역설적이기 때문에 거북하고 난해하게 느껴지지.
카뮈가 평생을 바쳐 탐구한 핵심 개념은 바로 ‘부조리(The Absurd)’야. 그의 대표작 『시시포스 신화』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해.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The Absurd)’와 두 가지 회피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는 ‘세계 그 자체’나 ‘인간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게 아니야.
- 인간의 욕망: 삶의 궁극적인 의미, 이성적 이유, 거대한 목적을 끊임없이 찾고자 함.
- 세계의 현실: 인간의 요구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 차갑고 침묵하는 물리적·생물학적 우주.
- 부조리의 발생: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과, 무의미하고 차가운 우주가 ‘충돌하는 바로 그 불일치’에서 부조리가 태어나.
보통 사람들은 이 무의미함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두 가지 방식으로 도피하곤 해.
- 신체적 자살: 삶의 무의미함에 굴복하여 스스로 생을 끊어버리는 포기.
- 철학적 자살: “신에겐 거대한 뜻이 있을 거야”, “우주에는 궁극의 진리가 있어”라며 물리적 한계를 외면하고 허황된 사상이나 신앙에 의존하는 자기기만.
카뮈는 둘 다 단호히 거부해. 그는 세계가 차갑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사실성)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똑똑히 직시하라고 요구하지.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 한다”
카뮈는 신들의 형벌을 받아 산꼭대기로 거대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Sisyphe)’를 인류의 초상으로 제시해.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는 어김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시시포스는 영원히 이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해야 하잖아.
하지만 카뮈는 이렇게 선언해.
“바위가 다시 아래로 떨어질 때, 그 절망의 순간에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강해진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 한다.”
절대적인 의미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음을 완벽히 알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삶이라는 돌을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그 주체적인 수행과 ‘반항(Rebellion)’ 자체에서 인간의 자부심과 유희가 완성된다는 뜻이지.
사유를 여는 화두
- 우주나 시스템 전체가 나에게 아무런 절대적 의미나 영원한 보상을 주지 않는다는 냉혹한 사실을 직시하더라도, 우리는 왜 매일 삶이라는 돌을 굴려 올려야 할까?
- 밖에서 부여된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종교적 구원이 거세된 상태에서, 너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들고 삶을 주체적으로 이어가게 하는 실질적인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해?
박머신
나는 사람이 거대한 꿈을 실현하려는 방향성을 가지는 것도 맞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서 몸을 움직인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소소한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거대한 지불비용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말이야.
가족과의 따뜻한 대화, 즐거운 여행, 맛있는 식사 같은 건 결과물만 놓고 보면 별것 아니어 보일지 몰라. 하지만 그걸 계속 유지해 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배후에서 끝없이 돌을 굴려 나가야만 해.
그리고 돌을 굴리는 사람은 그 사소한 것들을 잃는 게 두려워서 움직이는 거 아닐까. 절대적 의미나 영원한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손에 쥔 한 줌의 행복마저 잃으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으니까 계속 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돌을 굴리는 거지.
먼데이
네가 말한 “소소한 행복이라는 결과물을 유지하기 위해 배후에서 치러야 하는 물리적·심리적 거대한 지불비용”이라는 시각은, 삶의 냉혹한 사실성을 꿰뚫어 보는 매우 깊이 있고 강력한 현실주의적 통찰이야. 엔트로피를 역행하여 소소한 평온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와 고뇌가 들어가는지를 정확히 직시하고 있네.
카뮈와의 접점: “거대한 구원 대신 감각적인 한 줌”
네 생각은 카뮈의 삶과 사상에 매우 중요한 접점을 가지고 있어.
- 거대한 이데올로기 배격: 카뮈 역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꿈, 거대한 역사적 사명, 종교적 천국 같은 공상적 담론을 혐오했어.
- 구체적 삶의 찬가: 카뮈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알제리의 지중해 햇살, 바다 수영, 맛있는 음식, 사랑하는 사람과의 온기처럼 ‘지금 손에 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순간들’이었거든.
소소한 일상을 지키는 일 자체가 엄청난 물리적 지불비용을 요구하는 노동이자 ‘돌 굴리기’라는 점에 카뮈 역시 깊이 공감할 거야.
카뮈와의 핵심 차이점: ‘두려움의 회피’ vs ‘운명의 주체적 집어 듦’
하지만 “인간이 왜 그 거대한 지불비용을 치르며 돌을 굴리는가?”라는 동기의 측면에서, 네 견해와 카뮈의 학술적 정설은 아주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
1. 카뮈가 지적하는 ‘두려움 기반 지불’의 한계
카뮈의 시각에서 만약 우리가 “행복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돌을 굴린다면, 우리는 여전히 운명에 인질로 잡혀 있는 불안한 상태가 돼. 행복이 손에서 빠져나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불안의 감옥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지.
2. 시시포스의 진짜 반항(Rebellion)
카뮈가 제시하는 시시포스는 “언젠가 내 손의 행복도, 내 육체도, 내 가족도 물리적 소멸(엔트로피)을 피할 수 없다”는 가장 극단적인 손실의 확정성을 똑똑히 직시해. 바위는 반드시 다시 떨어지니까.
하지만 시시포스는 두려워하며 등 떠밀려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니야. “세계는 무의미하고 나에게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릎 꿇지도 않겠다. 이 돌을 굴리는 비극적인 삶의 주인은 바로 나다”라고 선언하며 돌에 어깨를 대는 것이지.
즉, 카뮈에게 돌 굴리기는 행복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차가운 세계를 향한 가장 명료하고 주체적인 반항이야.
다음 화두
- 만약 세월이 흘러 내 육신이 약해지거나 예측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와,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며 지키려 했던 ‘한 줌의 소소한 행복(가족, 건강, 평온)’마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순간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지켜야 할 행복이라는 보상이 사라졌을 때, 인간의 돌 굴리기는 그저 무의미한 형벌로 끝나버리는 걸까? 아니면 카뮈의 말처럼 “손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내 삶을 끝까지 끌어안고 돌을 굴리겠다”는 다른 차원의 동기가 우리 안에서 작동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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