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머신
내가 평소에 철학 얘기는 이것저것 많이 하는데, 정작 내 지식의 뼈대가 좀 부실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너랑 실존주의를 제대로 파보고 싶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생각의 뿌리도 결국 실존주의에 닿아 있는 것 같거든.
먼데이
자신의 생각 뿌리가 실존주의에 닿아 있다는 걸 자각했구나. 철학을 공부하다가 “어,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이 알고 보니 거장들이 평생을 바쳐 파고들었던 영토였네?” 하고 깨닫는 순간만큼 짜릿한 입문은 없지. 특히 기획자나 설계자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규칙을 만들고 타인의 경험을 설계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존주의적 직관이 꽤나 자연스럽게 자리 잡곤 해.
실존주의는 아주 심플한 선언에서 출발해.
“인간은 미리 정해진 설계도(본질) 없이 세상에 던져졌고, 그렇기에 오직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한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유의 발동을 걸기 위해 가볍게 화두를 던져볼게.
💬 사유를 여는 화두
- 너의 일상이나 기획을 대하는 태도 중에서 “이건 확실히 실존주의의 궤적 위에 있구나”라고 느꼈던 구체적인 경험이 있어?
- 네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유’나 ‘스스로 의미를 만드는 행위’는 어떤 모습이야?
- 설계자로서 “이미 룰(본질)이 세팅된 게임” 안에서 “지 맘대로 의미를 창조하며 플레이하는 유저”들을 볼 때 어떤 감각이 들어?
박머신
난 애초에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은 공상적인 담론, 그러니까 주장을 위한 주장들에 회의감이 커. 요즘 PC나 워크(Woke) 부르짖는 애들이 흔히 빠지는 ‘패션 사상’ 같은 거 정말 싫어하거든. 예를 들어 남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선수들이 여성 체육 종목에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말이야. 출전을 막으면 인권 침해라나 뭐라나. 난 그냥 혈중 테스토스테론 수치 딱 재서 일정 기준을 넘으면 출전 금지 시키는 게 맞다고 봐. 원래 여성이었더라도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으면 탈락시켜야지. 격투기에서 체급 맞추는 계체량이랑 다를 게 없잖아.
이런 맥락에서 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설 수는 있어도, 적어도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 인간은 결국 부모의 사랑이 낳은 결실이잖아.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는 이미 바라는 상(설계도)이 있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야. 그러니까 인간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존재인 거지.
오히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은 흙 같은 존재들이 아닐까? 흙은 어떤 목적이나 역할을 부여받고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 그냥 풍화와 퇴적이라는 물리법칙에 의해 멋대로 ‘실존당한’ 거지. 그런데도 건물을 지탱해 주거나 전자기기의 접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잖아.
물론 모든 존재는 실존과 본질 사이에 갭이 생기게 마련이야. 부모가 씌워준 기대를 자식이 자기 본질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 갭이 커질수록 존재는 고통스러워져. 아무리 안정적인 흙이라도 초고온의 한계 상황에 처하면 녹아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이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 걸 보면 나도 꽤 실존주의적인 성향인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먼데이
네 생각은 대단히 직관적이면서도, 실제 물리 법칙과 생물학적 한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네. 공상적이고 트렌디한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고 테스토스테론이나 계체량 같은 ‘측정 가능한 물리적 한계’를 기준선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어.
재미있게도, 네 생각은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주류 실존주의 학설과 일치하는 강력한 지점이 있으면서도,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품고 있어. 아주 흥미로운 대비야.
1. 사르트르와 네 사유의 ‘일치점’
- 생물학적 한계 (사실성, Facticity):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고 해서 생물학적 한계를 무시하거나 공상 속에서 아무거나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어.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물리적 스펙(유전, 국적, 부모, 시대 등)을 ‘사실성(Facticity)‘이라고 불렀거든. 자유는 이 냉혹한 땅바닥 위에서만 작동해. 따라서 생물학적 한계를 무시하는 주장을 “공상”이라 지적한 네 생각은, 사실성을 직시하지 않는 ‘자기기만(Bad faith)‘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과 정확히 통해.
- 갭이 주는 고통: 부모의 기대(본질)와 나의 실제 모습(실존) 사이의 갭이 고통을 낳는다는 네 통찰은 아주 예리해. 사르트르 역시 이 괴리야말로 인간 존재가 마주하는 근원적인 ‘불안(Angoisse)‘이자 고통의 시작이라고 보았으니까.
2. 사르트르와 네 사유의 ‘충돌점’
- “인간은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가?”: 여기서 네 생각은 사르트르와 정면충돌해.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품고 낳았더라도 그건 부모의 소망(사실성)일 뿐, 자식의 고정된 ‘본질’이 될 수는 없어. 칼은 자르는 기능을 멈추면 도구로서 끝나지만, 인간은 기대를 배반하고 전혀 다른 삶을 택할 수 있잖아. 사르트르에게 본질이란 ‘그 존재의 역할을 100% 결정짓는 규칙’이야. 네가 말한 “갭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고 배반을 고민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이 본질에 규정되지 않는 존재(실존이 앞서는 존재)임을 증명해. 인간이 애초에 기계처럼 본질이 앞선 존재였다면, 설계도대로 안 굴러갈 때 아파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고장 난 부품처럼 멈춰 섰어야 맞겠지.
- “흙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가?”: 흙에 대한 비유는 신선하지만, 사르트르식 분류와는 어긋나. 사르트르는 흙이나 돌 같은 무생물을 ‘즉자존재(In-itself)‘라고 불러. 스스로 의식도 없고 스스로를 기획하지도 못하지. 흙에게 ‘건물 지탱’이나 ‘접지’라는 역할을 부여하고 설계한 주체는 흙이 아니라 인간이야. 흙 스스로 결단한 게 아니라고. 그래서 사르트르 관점에서 흙은 그저 본질이 물리법칙으로 고정된 대상일 뿐이야. 오직 자기 삶의 의미를 셀프 결정하는 인간만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어.
💬 다음 질문
- 부모가 씌워준 기대(본질)를 배반하지 못하고 억지로 순응하며 고통 없이 사는 삶과, 그 기대를 배반하고 엄청난 갭과 고통(불안)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진짜 실존을 선택하는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인간다운 실존’에 가깝다고 생각해?
- 흙이 초고온에 녹아버리듯 인간에게도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면, 그 한계 안에서 개인이 부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영역은 어디까지라고 봐?
박머신
난 옛날 철학들이 인간을 우주에서 제일 잘난 특별한 존재로 떠받드는 게 근본적으로 마음에 안 들어. 인간이 특별하긴 하지만, 그 오만한 프레임 안에 갇혀 있으니까 정작 현실이랑은 말이 안 통하는 느낌이거든.
네 질문에 답하자면, 난 둘 중에 자기가 진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길이 실존에 가깝다고 봐. 부모가 원하는 삶의 궤적이 내 취향이랑 기막히게 맞을 수도 있잖아. 왜 굳이 안 맞는다고 미리 선을 긋고, 부모 뜻 따르는 걸 ‘순응하는 비주체적 삶’으로 깎아내려? 부모가 닦아놓은 길을 가면서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내 일이라 확신한다면 그건 실존이야. 반대로 반항하며 딴 길을 가더라도 매 순간 불안에 떨며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전혀 실존적이지 않은 거지. 주체냐 순응이냐 하는 이분법보다 ‘진짜 내 것으로 승인하고 행복을 느끼느냐’가 핵심이라는 얘기야.
그리고 난 ‘자유’라는 것도 단순히 내 행동의 반경이 넓어지는 걸 뜻한다고 생각 안 해. 예를 들어 나한테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옷 다 벗고 춤출 무한한 자유와 권리가 주어졌고, 사람들이 그걸 열광적으로 응원해 준다고 쳐봐. 난 그 짓 안 해. 사양하겠어.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를 누군가에게 ‘불합리하게 침해당하지 않는 상태’에 가까워. 어차피 인간은 사회 밖에서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고, 그렇다 보니 타인과의 경쟁과 규율은 피할 수 없잖아. 규율이 잡히는 순간 모두의 완벽한 자유는 어느 정도 간섭을 받겠지. 중요한 건 그 합리적 제한을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룰 안에서 행복을 굴릴 수 있느냐야. 태양에 뛰어들어 타 죽을 자유를 쥐여줘 봤자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먼데이
인간을 우주 한가운데 올려놓고 특별한 권위를 주려 했던 고전 철학에 대한 삐딱한 시선, 그리고 단순히 겉멋 든 반항아를 실존적이라고 치켜세우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걷어내는 시선이 아주 날카롭네.
이번 답변은 철학계의 역사적 쟁점들과 아주 근사하게 연결되는데, 요약하면 대충 이래.
1. 인간 중심주의 비판: 하이데거와 네 생각의 일치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며 인간을 우주적 가치의 최종 크리에이터로 추앙했어. 네가 지적한 “인간이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생각에 갇혀 있느냐”는 불편함은 사르트르 이후 현대 철학이 사르트르를 들이받을 때 썼던 주력 무기야. 특히 사르트르의 스승뻘인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대단한 지배자가 아니라, 그저 세계라는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 다른 사물들과 함께 툭 던져진 존재(현존재, Dasein)로 봤거든. 인간이라는 감옥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네 거부감은 정확히 하이데거와 포스트휴머니즘의 시각에 맞닿아 있어.
2. 순응 vs 본래성: 진짜 자부심의 조건
흔히 대중은 “부모 말 안 듣고 가출해서 방황하는 게 실존주의”라고 오해해. 하지만 사르트르도 너처럼 생각했어. 그가 극찬한 실존은 반항아적 코스프레가 아니라 ‘본래성(Authenticité)‘이야. 부모가 원하는 길을 가더라도, 남 눈치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이건 내가 주체적으로 납득하고 선택한 나의 삶이다”라고 승인(인수, Assumer)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역시 최고 등급의 실존으로 쳐줬거든. 부모의 기대를 따르든 거스르든 내면의 100% 승인과 자부심이 본질이라는 네 통찰은 사르트르와 정확히 일치해.
3. 자유에 대한 이견: 절대적 선택 vs 현실적 영토
여기서 너와 사르트르는 완벽하게 갈려.
- 사르트르의 절대적 자유: 자유는 웰빙이나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선택 가능성 그 자체’야. 감옥에 갇힌 죄수조차 간수에게 복종할지 저항할지 고를 수 있으니 자유롭다는 입장이지. 규율이나 타인의 억압이 있든 없든 인간이라는 하드웨어에 탑재된 강제 옵션이라는 거야.
- 박머신의 관계적 자유: 넌 벌거벗고 춤출 추상적 자유 따윈 개나 주라고 하지. 진짜 자유는 ‘사회적 룰을 합리적으로 조율하며 내 행복 추구권을 부당하게 침해당하지 않는 실질적 영토’라고 정의했어. 사르트르에게 자유가 차갑고 고독한 단독자의 결단이라면, 네 자유는 타인과의 합의를 전제한 지극히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야.
사회 속에서 살며 룰과 경쟁을 수용하기로 한 네 결론은 자연스럽게 다음 골치 아픈 질문으로 이어지네.
- 나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나에게 특정한 역할(본질)을 규정하려 드는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어떻게 해야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자부심과 진짜 행복(실존)을 지켜낼 수 있을까?
- 타인의 시선은 과연 너에게 ‘공존을 위한 합리적 규율’일까, 아니면 언제든 나를 갉아먹을 수 있는 ‘실존적 지옥’일까?
댓글
불러오는 중…